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질문]
목사님들이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 순종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 전인격적으로(지정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의 이해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예정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든 죄인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인이, 하나님을 몰랐든 죄인이, 하나님을 부인하든 죄인이, 성령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영접하게 되어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스스로(자기가, 인간이) 영접하고, 믿고, 순종하고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인간이 믿고 순종해서 영접을 해야 되는 것인가요 아니면 성령님(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구원을 허락하시는 것인가요? 만약,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구원을 허락하시면 왜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하나요? 왜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라고 해야 하나요?
[답변]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의한 구원을 논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누구나 질문자와 동일한 세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1)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2)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이라고 하면서 왜 자꾸 믿으라고 하는가? 그 믿음과 순종의 의미는 무엇인가? 3)예정에 의한 구원이라면 구태여 우리가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 각각에 대해 나눠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구원과 자유의지
1.1.예정에 대한 오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한 두개 오해를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정이라고만 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상태와 전혀 상관 없이 독선적이고도 무조건적으로 나기 전부터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다는 식의 숙명론적 결정론(Determinism)으로만 이해하려 듭니다.
모든 인간의 자연적 상태는 단 한명의 예외 없이 죽음의 형벌로만 갚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죄인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측량하기 어려운 사랑이라는 시각에서만 이해되는 그분의 자유롭고도 은혜로운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이 아니었더라면 영원한 멸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의 다른 표현이 예정입니다. 그 선택 안에 든 자만이 예정이 이해되고 은혜가 됩니다. 따라서 예정에 대한 신자의 올바른 반응은 피택(被擇)된 것에 대해 감사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또 예정을 시간적으로 예지(豫知)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구라는 한정된 시공간 안에 사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예정에 의한 선택은 분명히 하나님이 미리 알고 선택하여 인간의 현재 상태와 무관하게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은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영원한 현재의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여의도 5.16 광장에 개미 한 마리가 동에서 서로 80년에 걸쳐 가로지르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라면 63빌딩 위에서 광장 전체를 한 눈에 바라 보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개미는 앞에 언덕이 있는지 물이 흐르는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밟혀 죽을지 전혀 모릅니다. 이미 가로지른 거리는 과거로, 열심히 가고 있는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길은 현재로, 또 닥치는 미지의 길은 미래로 밖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도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러나 그 전체를 훤히 내려다 보는 입장에선 과거, 현재, 미래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시간은 관측자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를 필립 얀시가 잘 설명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착하는데 약 8분이 걸립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태양은 사실 8분 전의 태양입니다. 일출이나 일몰 모두 실제보다 8분 늦게 봅니다. 그러나 한 쪽 발은 지구에 다른 한 쪽 발은 태양에 둘 수 있을 만큼 아주 거대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면 태양을 보통 사람보다 8분 먼저 볼 수 있고 지구 또한 같은 시각에 관측이 가능합니다. 그럴 경우 그 사람에게 지금 몇 시입니까라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거대한 사람보다 더 큰 존재입니다. 우주의 한 복판에서 우주 전체를 보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밤 하늘의 한 별이 이미 수십만 년 전 블랙홀에 흡수되어 없어졌지만 지구와 거리가 수백만 광년 떨어져 있다면 여전히 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현재 시제로 볼 뿐입니다.
예정을 너무 시간적 예지의 개념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조차 없었던 정말 여의도 광장의 개미 한 마리만도 못한 인류에게 그 분은 영원한 사랑으로 간섭하셨다는 무한한 은총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났고 그를 믿는 신자에게 베푸는 그 사랑은 이 지구상의 시간과 공간 안에 제한해 이해하려 하지말고 전 우주에 단 한 번 뿐인 은혜로 받아 들이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3:8)
2.2. 선택과 자유의지
아무리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구원이라고 하지만 일단 믿고 나면 분명히 내가 믿었다는 의지적 결단을 한 것으로 인식되므로 어느 정도 자신의 자유의지가 분명히 작용한 것 같습니다.
구원에서 인간의 의지가 과연 어디까지 작동했는가에 대해 신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갑과 을 둘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데 갑은 구원 받았고 을은 못 받았다 가정합시다. 이 때 갑과 을이 믿음으로 영접할 때에 자유 의지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지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 몇 가지만 간단히 소개해보겠습니다,
- 펠라기우스주의: 갑은 믿기로 을은 거부하기로 완전히 인간의지로 결정했다.
- 반(半-Semi) 펠라기우스 주의: 갑은 믿기로 노력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지만 을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 아우구스티누스: 갑은 예정되어 있는 은혜에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이었고 을은 예정이 되어 있지 않았다.
- 아르미니우스: 갑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협력하였고 을은 협력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갑은 믿어서 선택을 받았고 을은 믿지 않아 버림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되 믿음은 불가항력적이 아니고 인간이 여기에 대해 준비할 수 있으며 믿는 자도 타락할 수 있다.
- 루터: 갑과 을 두 사람 다 하나님의 은총에 협조할 능력이 없었다. 갑은 결국은 굴복했지만 을은 고집스럽게 은혜에 저항했다.
- 캘빈: 갑은 성령의 새로운 창조 능력으로 중생했고 을은 그렇지 못했다.
그럼 성경은 과연 이 중에서 어떤 것을 지지합니까? 질문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요3장)는 분명히 자기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노력했고 선택했고 하나님 은혜를 거부할 리도 없었고 오히려 굴복할 준비도 되어 있었던 자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니고데모 같이 의롭고 선한 자가 없었습니다. (요7:20-52, 요19:39,40 참조) 그러나 그는 성령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이해하지 못해 돌아 갔고 구원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예정에 들지 못했다는 것 말고는 이 사건을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 스스로 복음을 거부했거나 협조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성령의 거듭남에 대해 모르는 부분을 예수님에게 질문했고 또 주님은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비유하자 제자들이 그럼 도대체 누가 천국을 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인간의 노력과 상관 없이 성령의 간섭으로만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느니라."(롬8:15),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1:8)
특별히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고 했습니다. 니고데모의 경우에는 성령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그의 영혼 속에 성령이 임재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정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다 주시면 기계적 구원이 됩니다. 반대로 인간이 성령을 받겠다고 소원하고 마음 문만 열면 성령이 임재하게 된다면 니고데모의 경우에 구원을 받았어야 합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의해 받아야 할 사람에게만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나눠줍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성령에 의해 이뤄진다면 당연히 예정이며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1.3 성령의 원자폭탄 - 구원
그럼에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은 지정의로 인식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우리 영혼을 중생시킬지라도 우리의 영으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영이 바뀌면서 예수를 영접하고 믿고자 하는 의지적 결단도 일어나게 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작용되기 전에 일어난 영의 변화에 관해선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느냐고 성령의 역사에 대해 의문을 보이자 예수님은 "네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혹시라도 바람 소리가 들리듯이 성령의 소리가 들리거나 오는 기척은 알고 방향만 모른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는 바람이 임의로 불고, 사람은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도 어디까지나 그나마 인간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든 것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성령이 전적으로 역사해야만 이뤄집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동원되면 그 구원에 인간의 힘이 보태어진 것이 됩니다. 자칫하면 그 힘이 아무리 작아도 전적 은혜가 되지 않으며 선물로 주어진 것이 아니게 됩니다. 선물 받을 사람이 포장하는 마지막에 리본 다는 것도 함께 거들어 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자기의 자유의지로 받기는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물 받은 사람이 그 선물을 받는 데 어떤 역할을 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나아가 인간끼리는 선물 받는 사람이 거부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인간이 거부할 수도 없을 뿐더러 거부할만한 사람에게 주실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은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정으로만 이뤄지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선물로서 온전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또 다른 오해를 마셔야 할 것은 성령의 역사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이뤄진다고 해서 인간은 가만 있는데 하나님이 마취약을 주사해놓고 믿게 한다든지, 본인은 별 믿을 생각이 없는데 강제적 혹은 자동적으로 믿게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 조차 당신의 은혜를 수용하게 하는 통로로 간섭하십니다. 말하자면 믿고자 하는 마음이 들고 또 결심하고 영접하게 하는 것에 조차 비록 우리가 지정의로 거의 인식 못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로 이미 간섭하셨다는 뜻입니다.
구원과 자유의지의 상관관계를 자꾸 따지는 것은 사실은 교리적 측면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한 개인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과정에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진행됩니다. 이 예정의 교리를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든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구원하실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미 구원을 얻어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 온 자에게는 이 교리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은 자는 누구라도 자기는 100%의 철저한 죄인이었기에 하나님의 전적인 100% 은혜가 없었다면 구원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내가 믿기로 영접했다고 마치 자신의 의지가 많이 작용된 것처럼 말할지라도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진정으로 본인이 100%의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면 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동원한 자유의지는 구원을 받아 들이는 통로였지 하나님이 구원을 이뤄내는 데 힘을 보태드린 공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분이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과 그 분과의 일대일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재삼 재사 강조합니다만 선택과 예정, 구원과 자유의지는 자신이 철저하게 100% 죄인임을 인정하여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였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은혜로 간섭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일본이 이차대전 때에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습니다. 그 항복한 것은 분명히 일본의 자유의지였습니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항복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신자는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 이미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자 폭탄을 맞은 자입니다. 마치 일본이 강요된 것도 자동적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도 성령의 임재 후에 자기 의지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때에 자유의지가 얼마나 작용했는가 하는 문제가 무슨 특별한 의미를 가질까요? 또 성령의 원자 폭탄을 맞지 않은 자가 자유의지로 예수가 자기의 전 존재와 삶과 영원한 운명의 구세주로 믿어질까요? 혹시라도 기독교라는 종교체계를 공부해보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따라 살아야지 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예정하시고 신자는 전적으로 그 크신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