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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앞에 나오는 1-12절에 이어 두로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 계속되는 본문으로서 자랑의 위험성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복된 삶을 살려면 사랑하는 마음은 넘치게 하고 자랑하는 마음은 힘써 줄이십시오. 무엇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1. 건물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갈대아'는 '바벨론'을 뜻합니다. 결국 두로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파멸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윗 왕 말기에 두로 왕 히람이 성전 건축 재료를 공급할 정도로 두로는 물자가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두로의 궁전은 견고함과 화려함을 자랑했지만 바벨론이 공성 망대를 세워 공격해서 결국 폐허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성취를 화려한 건축물로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건축물이 자랑의 대상이나 높임의 대상이 되면 무의식적인 우상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업적을 자랑하려는 통치자가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의 건축에 열을 내면 건축 후에 나라가 내리막에 들어서고 결국 패망할 때가 많습니다. 회사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도 한때 건축으로 교회가 크게 성장했지만 지금은 건축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지났습니다. 적절한 건축은 필요하지만 교회성장이나 과시를 위한 건축은 오히려 교회와 교인을 어렵게 할 때가 많습니다. 요새 건축으로 빚더미에 허덕이고 이자도 잘 못 내는 교회가 많습니다. 기존 교회 건물도 점차 비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키우는 대신 사람을 키우고 건물을 남기는 대신 거룩한 내용물과 영향력을 남기려고 해야 합니다.

교회는 초대형 건축물이 필요 없도록 적절한 때에 스스로 분립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선한 분립이 없으면 조만간 분열되고 심해지면 파멸됩니다. 또한 건물이 지나치게 커지면 사람도 지나치게 커지면서 '내려놓기'가 힘들어지고 하나님도 떠나십니다. 분립을 외면하고 건물과 교회를 계속 키우려고 하면 선한 영향력은 오히려 떨어집니다. 보이는 선보다 보이지 않는 선을 더 중시하고 그것을 위해 때로는 보이는 것을 희생하려고 하십시오.

2. 지식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본문 14-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의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이 구절에서 "기생의 노래 같이 된다."는 말은 두로가 노예처럼 비참한 처지가 된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얼마나 그렇게 됩니까? 70년 동안 그렇게 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잊어버린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7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면서 과거의 옛 영화를 기억하려고 기생처럼 수금을 가지고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과거의 영화를 다 잃고 패망한 두로의 슬프고 비참한 처지를 잘 보여줍니다.

고대에 두로는 지중해 해상무역의 요충지로 엄청난 풍요를 자랑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풍부한 문화와 지식을 자랑한 도시국가였습니다. 경이로운 그리스 철학과 문화도 패망한 두로 거민들이 그리스로 대거 이주하면서 꽃핀 것입니다. 그런 두로 사람이 패망 70년 후에는 과거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우매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식이 때로는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집니까?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무식한 것입니다.

참된 지식인은 옅은 지식으로 남을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식하면 비판에 용감하고 유식하면 비판이 두렵습니다. 무식이란 '무엇을 모르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고 지혜란 '무엇을 모르는지를 잘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자랑하는 지식은 참된 지식은 아니다. 참된 지식은 자기 무지를 깨닫게 하고 사랑으로 인도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 밖에 아는 것이 없다. 너 자신을 알라."

헛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만 참된 지식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지식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솔로몬은 지식을 자랑하다가 자기 영혼도 망치고 나라도 망쳤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하면서 짧은 구약 지식으로 예수님에 대한 추측성 매도를 해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뻔 했습니다. 지식이 부족한 줄 알아야 참된 지식이 생기고 그런 겸손한 사람들이 많아야 공동체도 살아납니다.

3. 영성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주전 586년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자 두로 사람들은 인근의 무역 경쟁국이 사라졌다고 처음에는 좋아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선택된 백성이라더니 꼴 좋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의와 영성을 더 낫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결국 두로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외양과 풍요와 지식 자랑도 주의해야 하지만 성도가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영성 자랑입니다. 자기 의와 영성이 남보다 낫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신실하게 믿음생활을 해도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라고 자신을 감추고 최고의 봉사를 해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십시오. 자신감은 가지되 그것이 교만처럼 비춰지지 않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저만한 사람 있나요?"라고 하면서 스스로 높이면 떨어뜨리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면서 스스로 낮추면 높여주십니다.

의는 자기 죄와 허물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보기만 해도 간음했다."고 말씀했습니다. 계명을 잘 지킨다고 자만하지 말고 자기 의에 대한 과시를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의를 과시하면 말과 삶이 불일치하게 되면서 알곡이 없는 쭉정이 인생이 되고 매의 눈으로 남의 허물을 보는 선수가 됩니다. 남을 의리 없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의리 없이 행동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일전에 대 배우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많은 영화를 찍었는데 여전히 관객을 만나기 전엔 떨리나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부족한 건 부끄럽지 않지만 오만한 건 부끄럽기에 혹시 이번에는 내가 오만했을까봐 매번 떨려요." 오만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가다듬으면 인물의 가능성은 커집니다. 영성이 깊은 것은 자랑스럽지만 그런 자랑조차 없는 겸손한 영성이 참된 영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