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뇌 이식을 향한 프로메테우스적 열망

1985년부터 시작된 미국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는 주로 저예산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상영하고 심사하는 축제다. 대규모 자본과 초호화 캐스팅으로 승부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달리, 이 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심오한 인간 이해, 사회 비판, 재치있는 서사와 번뜩이는 아이디어 및 예술성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기서 두각을 드러내는 감독과 배우는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 및 프로모션 회사들의 열띤 스카우트 경쟁 대상이 된다. 한마디로 더 큰 무대에서 활약할 기회를 얻는 등용문이라 할 수 있다.

올해 선댄스 영화제 출품작들 중에도 다크호스가 등장했다. 평단과 대중의 호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붙잡은 풍자 스릴러 <겟 아웃(Get Out)>이 그 주인공이다. 2월 말 개봉되어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저예산 영화(제작비 500만 달러, 한화 약 56억원)로서는 기대 이상의 상업적 성공(제작비의 약 30배 수익)을 거둔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5월 개봉 후 한 주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 작품에 쏟아지는 호평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미국의 일상적인 흑인 인종차별의 현실을 지극히 예리하게 포착해서 보여주고, 스릴러 영화로서 당연하게 갖춰야 할 긴박감을 잘 유지하는 가운데 탁월한 심리묘사를 선보이며, 예상치 못한 반전과 통쾌한 복수장면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런 요소들에 대해서는 이미 다수의 평론가들이 자세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본 칼럼에서는 기독교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소재인 뇌 이식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사실 뇌 이식은 순전히 영화 속 공상으로만 치부될 일은 아니다. 영화 밖 현실에서도 머리 이식을 통해 사람의 몸을 교체하는 수술이 단행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 12월, 중국 하얼빈에서 한 러시아 희귀병 환자가 머리 이식 수술을 받을 것이다. 많은 신경외과 전문의들은 이 수술을 무모한 도전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화된 심장이식 수술도 처음 시도되던 1967년 당시에는 세계 의학계 전반으로부터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게다가 몇몇 동물 실험 성공 사례도 보고된 바 있었으니 아직 성공실패 여부를 단정하기에는 이르다고 볼 수 있다.

겟 아웃
▲동물을 대상으로 한 머리 이식이나 뇌 이식 수술 시도는 이미 1800년대부터 진행되어 왔다. 사진은 구 소련 외과의사 데미코프(Vladimir Demikhov, 1916-1998)가 1954년 개의 머리를 이식한 결과물. 한 달 이상 생존한 개는 없으나, 얼마 동안 두 개의 머리 모두 살아 있었다.

이처럼 인류는 인격의 전이를 통한 생명 연장을 꿈꾸고 있고, 또 그런 방향으로 의학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중문화를 통해 은연중에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뇌 이식과 인격 전이의 문제를 기독교인들은 어떤 입장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뇌 이식: 몸의 교체에 얽힌 다양한 욕망

영화의 줄거리 자체는 비교적 단순하다. 단지 추리극 같은 서사 구조 때문에 영화 중반까지 핵심 줄거리가 드러나지 않아 긴장감과 의구심을 유발할 뿐이다.

장기이식 수술을 위해 흑인 젊은이들의 인신매매를 일삼는 백인우월주의 성향의 아미티지(Armitage) 가족이 건강하고 젊고 재능있는 흑인 사진작가 크리스(Chris)를 속여 희생물로 삼으려다, 그의 반격에 의해 화려한 복수의 제물이 되는 이야기이다.

얼핏 생각하면 흔한 불법 사기 장기적출 범죄단 이야기 같은데, 문제는 여기서 이식되는 장기가 신체 한 부분이 아니라 몸 전체라는 점이다. 즉 장기이식 의뢰인의 뇌를 적출해 희생자의 머리에 이식, 인격을 옮기는 일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겟 아웃
▲영화 속 뇌 이식 수술 의뢰인인 백인 노인으로부터 뇌를 적출하는 아미티지 가족의 가장. 아미티지 가족은 이 뇌를 주인공 크리스의 몸에 이식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뇌 이식을 원하는 백인들의 욕망은 다양하다. 젊은 날 골프선수였던 백인 노인은 크리스의 건강한 몸을 통해 다시 골프선수가 되려 한다. 늙은 남편의 몸에 질린 한 백인 여성은 남편의 뇌를 크리스의 몸에 이식해 젊은 몸을 가진 남편을 얻고 싶어한다. 맹인이면서 거물급 미술품 매매자로 유명한 한 백인은 유명한 사진작가인 크리스의 심미안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한다.

가문의 파티를 명분으로 크리스를 뇌 이식 입찰대상자들 앞에 선보인 순간, 백인들이 크리스와 대화하며 드러낸 욕망들이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크리스는 흑인의 몸이 가진 이점만을 나열하는 백인들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단지 기분이 크게 상할 따름이다.

영화의 서사 진행을 보면서 일면적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뇌 이식을 결코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크리스에게 시도되는 뇌 이식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이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단지 몸을 빼앗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아미티지 가족의 안주인이자 정신과 의사인 미시(Missy)는 크리스의 육체를 빼앗는 예비 과정으로 크리스에게 강력한 최면을 건다. 미시의 최면이 발동되면, 크리스의 정신은 몸의 지배권을 빼앗긴 채 의식 깊은 곳에 구속된다.

크리스는 몸 바깥의 상황을 멀리서 감지할 수는 있지만 몸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의식 깊은 곳에 갇힌 채 철저히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

타인의 뇌가 이식된 상태도 이 세뇌 상태와 동일하다. 자신의 의식은 또렷하게 살아 있어 바깥의 일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의 주도권은 몸을 차지한 뇌의 주인, 즉 백인 의뢰인들에게 있다.

영화는 이런 상황을 대단히 섬뜩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크리스의 의식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삶의 자유를 완전하게 빼앗긴 상황을 쳐다보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도무지 헤어나올 가망이 없는 지극히 공포스러운 감옥, 즉 지옥과 같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섬뜩한 점이 이것이다. 이미 많은 흑인 청년들이 이런 식으로 희생된 채 몸을 빼앗겨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고, 크리스도 그렇게 되기 직전의 위기상황에 놓여 있다.

영화는 뇌 이식이라는 행위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윤리의 입장에서 비판한다. 칸트의 정언명령 제2원칙은 다음과 같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

사람, 특히 흑인이 철저히 도구 취급을 받는 비윤리적 상황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섬뜩한 묘사는 칸트가 제시한 도덕적 명령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겟 아웃
▲최면에 빠져 의식이 가라앉고 있는 크리스. 보고, 듣고, 감각할 수는 있으나 의식은 내면에 갇혀 방관자가 된다. 이식된 뇌의 주인이 몸의 지배권을 차지한다.

◈자기 정체성: 영혼(혹은 정신)과 육체에 대한 이해, 일원론(monism)과 이원론(dualism)

뇌 이식, 혹은 머리 이식이라는 행위에는 반드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뒤따른다. <겟 아웃>은 이 문제를 극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백인의 뇌가 이식된 흑인의 몸, 과연 누가 진정한 자아인가?

영화의 해답은 간명하다. 칸트적 윤리에 입각해, 뇌의 주인인 백인을 불법침입자로 규정한다. 영화 속 백인들은 흑인의 의식을 감금한 채 몸의 통제권을 강압적으로 빼앗는 범죄자들이다. 흑인의 진정한 자기의식은 비록 뇌 상당부분이 제거된 상태에서도 몸을 기반으로 생존해 있다. 따라서 진정한 자아는 원래 몸의 주인인 것으로 밝혀진다.

영화 속에서 백인의 두뇌에 몸의 통제권을 빼앗긴 흑인들이 자주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아무리 최면과 뇌 이식을 통해 원 주인의 의식을 가둬 두었다 해도, 몸은 원 주인의 의식을 기억하고 있다.

백인의 의식은 일종의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취급된다. 뇌라는 신체기관에 붙어 들어와 원 주인인 흑인의 의식에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즉 <겟 아웃>은 사람의 자기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일원론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영혼과 육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서구적 이해의 소사(小史)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영혼과 육체를 서로 구분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제우스, 헤라 등을 비롯해서 수많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정령들은 자기의식을 확고하게 유지한 채 자유자재로 몸을 변형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의 정신은 몸의 형태와는 무관하게 보존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이해에도 이어졌다.

겟 아웃
▲아폴론의 구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무로 변신하는 다프네. 그리스 신화 속 신과 인간은 대부분 몸의 변신 후에도 자기의식을 유지한다. 영혼이 몸과 별개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반영된 것이다.

일례로 2세기 경 학자이자 교육자인 아르테미도로스(Artemidorus of Daldis)는 꿈의 해몽에 관한 저서를 남겼는데, 그는 꿈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한 채 몸이 변형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기록했다. 아르테미도로스의 기록은 몸의 변형에 대한 고대 서구인들의 사고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들은 대부분 사람의 영혼이 몸과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을 수긍했다.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만남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적 관계에 대한 확신을 보다 확고한 진리로 내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인간이해를 상당 부분 계승한 플라톤 철학, 그리고 육체의 죽음 후 자기의식의 존속 및 부활과 영생을 가르친 기독교 신앙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적 관계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이런 확고한 믿음은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코기토(cogito)에 대한 사유로까지 계승되었다.

그러나 18세기를 지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져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일원론적 이해가 점차 인간 이해의 핵심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라 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 1709-1751)로 대표되는 프랑스 계몽주의 유물론자들을 시작으로,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나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등을 경유하여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육체를 정신의 근원으로 보는 경향이 점차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된다.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세속화에 의해 기독교의 사회적∙학문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이원론에 근거한 인간 이해는 힘을 잃고 일원론적 사고가 지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겟 아웃> 역시 시대적 대세를 따라 영혼(정신)과 육체에 대한 일원론적 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기에 뇌 이식이라는 행위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다. 일원론적 관점에서 뇌 이식이란 서로 맞지 않는 정신과 몸을 섞어놓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겟 아웃
▲정신(백인의 뇌)과 몸(흑인 여성)의 부조화로 이상행동을 보이는 여성. <겟 아웃>은 영혼(정신)과 육체의 일원론적 이해를 반영하는 영화다.

◈계속되는 일원론-이원론 논란: 특정한 마음(두뇌)과 거기에 정합하는 육체 사이의 관계

20세기 들어와 의학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장기이식이 일반화되면서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논란의 쟁점은 사람의 자기 정체성이 심리적인 연속성에 기반을 둔 것인가, 아니면 육체적인 연속성에 기반을 둔 것인가에 관한 물음이다. 머리 이식, 혹은 뇌 이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는 고민해보지 않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저명 심리철학자 존 설(John Searle)은 사람의 자기의식이 전적으로 뇌 속에서 발생하는 신경생리학적 과정(neurobiological process)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몸이든 머리 이식이나 뇌 이식이 성공한다면 뇌의 원 주인의 정신이 몸을 지배할 것이라고 믿는다.

뇌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과 자기의식의 심리적 연속성이 새로운 몸에서도 그대로 작동할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다. 설의 견해는 오늘날 머리 이식 혹은 뇌 이식 수술의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측의 입장을 대변한다.

반면 신경과학자(neuroscientist)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는 안토니오 다마시오(António Damásio)의 경우 사람의 자기 정체성이 육체적 연속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믿는다. 다마시오는 뇌의 활동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정신이 사람의 자기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뇌에 합당한 조화를 이루는 육체가 뇌와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자기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는다. 다마시오의 견해대로라면, 머리 이식이나 뇌 이식은 성공 자체가 불가능하거나(뇌 속에 담긴 정신과 새로 부착되는 육체의 부조화로 인해), 혹 성공하더라도 이식된 뇌가 갖고 있던 자기 정체성이 그대로 보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어느 측의 주장이 맞을까? 몇 달만 기다리면 해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올해 12월 실제로 사람의 머리 이식 수술이 집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술 집도자는 이탈리아의 신경외과전문의인 세르지오 카나베로(Sergio Canavero) 박사이며, 수술 대상자는 러시아의 컴퓨터 엔지니어인 발레리 스피리도노프(Valery Spiridonov)라는 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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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이식 수술 집도 예정인 외과의 세르지오와 수술 대상자 발레리.

발레리는 근육이 퇴화하는 희귀병인 베르드니히-호프만병(Werdnig-Hoffman disease)을 앓고 있다. 그는 이 병 때문에 머리 아래 몸의 성장이 멈췄을 뿐 아니라 온 몸에 뼈와 피부 외에 근육이 거의 없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언제 신체 기능이 멈출지 알 수 없어 죽음만 기다리던 차에, 세르지오 박사의 머리 이식 수술에 지원했다. 그는 올해 12월 중국 하얼빈의 한 병원에서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건강한 신체 기증자의 몸으로 머리를 이식할 예정이다.

세계 의료계의 반응은 비난 일색이다. 끊어진 뇌와 척수의 연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신경의학계의 중론이다. 일각에서는 프랑켄슈타인 수술이라 불리울 정도로 비난을 받고 있다. 윤리적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머리 이식은 신체 기증자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어떤 절차에 따라 신체 기증이 이뤄지는지에 대해 세르지오 박사 측은 아직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은 상태다.

뿐만 아니라 수술 성공 후 발레리의 자기 정체성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무엇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머리 이식 수술 후의 사람을 온전한 영혼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한다.

수술 계획에 대한 발표가 나온 뒤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는 즉각 발레리에게 경고를 보냈다. 러시아 정교회 측은 발레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 규정했다.

여기서 정교회 지도자들이 밝힌 경고의 이유가 흥미롭다. 발레리의 머리에 부착될 몸에는 원 주인의 영혼이 보존돼 있는 상태이므로, 만일 수술이 성공한다면 머리 속 자기의식(정신)과 영혼이 서로 정합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존재가 탄생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정교회의 신학은 사람의 삶을 이해함에 있어 영혼과 육체의 일치를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발레리의 머리는 몸 전체에서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몸은 신체기증자의 것이기 때문에, 둘이 합쳐진 몸에는 결국 신체기증자의 영혼이 남을 것이라는 해석이 도출된다. 그리고 발레리의 병든 몸은 머리를 떼어낸 뒤 죽기 때문에, 더 이상 발레리의 영혼은 몸에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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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이식 수술. 머리를 잘라낸 뒤 다른 몸에 붙인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의 신학적 해명이 전 세계 기독교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교회 지도자들의 기민한 반응은 본받을 만 하다. 영혼의 거취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머리·뇌 이식 수술이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심각하게 위배하는 행위라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보였다.

향후 이 문제는 윤리적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수술 결과가 실패라면 그나마 파장이 덜하겠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교회 내에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대해 교계에서 확고한 성서적-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신자들을 교육시키지 않는다면, 동성애 문제와 같이 이리저리 세태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일 것이 명약관화하다.

기독교인들 또한 새로운 몸에 대한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심각한 병에 걸렸거나 나이고 많고, 수술을 감당할 만한 권력이나 재력이 있다면 이런 유혹은 Sci-fi(science fiction, 공상과학물)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일이 아니라 당장의 현실이 된다. 여기에 대해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만화 같은 현실: <공각기동대> 속 세계의 도래

영화 <겟 아웃>은 뇌 이식이라는 행위를 삶과 자유를 빼앗는 범죄와 결부시켜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범죄행위를 우회하는 대안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 <아일랜드(Island, 2005)>와 같이 체세포 복제를 통해 몸을 이식할 대안을 마련한다면? 혹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총몽(1993)>이나 <공각기동대(1995)>와 같이 기계로 된 안드로이드 신체를 장착한다면?

겟 아웃
▲<총몽>과 <공각기동대>. 머리, 혹은 뇌만 남겨둔 채 안드로이드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예견한다.

실로 만화 같은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건강한 몸과 수명연장을 위한 사람의 한없는 욕망은 머리·뇌 이식과 관련된 모든 기술에 가공할 만한 추진력을 부여할 것이다.

칸트의 윤리관에 입각한 <겟 아웃>의 비판적 자세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환영할 만하다. 자기의식과 도덕에 대한 칸트의 사유도 기본적으로는 어거스틴의 개별적 영혼 이해에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겟 아웃>은 자기 정체성을 중시하는 기독교적 문화 전통을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중문화의 향방을 보면 교회가 앞으로 당면할 시대적 요청과 도전을 알 수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과 진단의 선두주자 중 한 사람인 켈튼 콥(Kelton Cobb)은 이를 '시대의 표적(the Signs of the Times, 마 16:3)'이라고 부른다.

대중문화가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들은 차근차근 그 성과를 획득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성애다. 미국에서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이룩하기까지, 동성애 옹호자들은 미디어와 대중문화를 통해 끊임없이 그들의 요구를 대중에게 주입시켰다.

다음 차례는 무엇일까? 여러 후보들이 존재하지만, 가장 확연하게 부각되는 것은 생명윤리의 기준 완화다. 최근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A.I., 인간복제, 머리·뇌 이식 등은 모두 궁극적으로 수명 연장과 영생을 향한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 없이 사람의 기술에 의존해서 영생을 이룩하려는 프로메테우스적 욕구가 일상에 범람하고 있는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지혜를 확보해야 할까? <계속>

박욱주
▲박욱주 박사.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