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신(Chorazin)으로 가는 길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제자들의 훈련과 파송 장소였던 가버나움에서 북동으로 약 4km(2.4 마일)지점 상류 요단강의 갈릴리 바다 마지막 합류 지점인 벳새다의 요단강 서쪽 지점에 고라신이 있다.
갈릴리 바다의 최대 도시인 티베리아스에서 고라신까지는 21.1km (13.11 마일)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좀 더 내려가면 벳새다를 만나고 벳새다가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헬몬 산으로 갈 수 있으며 동남으로 갈릴리 바다를 끼고 돌아가면 거라사 지방과 골란고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
현재는 큰 도로상에 있지 않고 작은 지방도로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는 않다. 예수님의 고향이었던 나사렛에서는 60번 도로와 65번 도로를 경유하여 갈릴리 바다 북서쪽으로 약 48.3km(30마일)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
이곳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소외된 곳이다. 마11:21과 눅10:13의 무대이다. 고라신은 ‘나무 많은 곳’이란 뜻이다. 오늘날 이곳은 전혀 나무가 없는 황폐한 지역이지만 고대에는 유대인들이 주요한 밀 경작지였고 16세기 무렵부터는 갈릴리바다에서 일하는 어부들의 중요한 거점 도시였다.
성경대로 보면 예수님께서 종종 방문하셨고 권능을 행하시며 사랑하였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가버나움, 벳새다와 함께 갈릴리 북부 해변의 중앙을 이루는 성읍이었고, 상당한 인구가 거주하였던 도시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였을 때 납달리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으로서 납달리 지파가 이방인들과 더불어 살았던 지역으로 보여 진다. 지금도 폐허가 된 고라신을 방문하여 보면 회당이 성읍의 중심이 되어있음을 본다. 아마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이방인들이 더불어 살았던 것 같다. 성의 이름이 암시하듯이 이 지역은 주로 농업을 하는 곳으로 올리브 생산에 사용되었던 압착기와 포도주 틀이 발굴되고 있다. 고라신이 올리브유 생산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농업의 산물로 풍요로움이 넘쳐서일까? 예수님이 많은 권능을 행하시고 사랑하셨던 도시지만 회개치 아니하므로(마11:20) 주님의 책망을 받고 종국에는 주후 6세기에 일어난 지진에 의해 완전한 파괴가 돼 사람들은 더 이상 살지 않는다.
고라신의 발굴
현재는 이스라엘 국립공원(National Archaeological Park)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고 1962년부터 1964년까지,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두 번에 걸친 대규모 고고학적 발굴을 시도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발굴 결과 검은 현무암으로 된 유적물들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갈릴리 주변의 화산 활동과 관련된 지질학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의 건물들은 검은 색의 현무암으로 지어졌으며 기원후 3세기 말에 지어진 회당을 비롯한 도시의 여러 부분들이 발굴되어 정리되어 있다.
고라신에서 특히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유대인 회당 안에 모세가 앉자 있었다는 상석이다. 회당 문 곁 우측으로 돌 의자가 하나 있는데 바로 ‘모세의 의자(Cathedra)’다. 바로 이 의자가 모세가 옛날 출애굽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할 때 앉자 있었다는 상석인 것이다. 이 의자에는 “Remembered for good”이라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 이 의자의 원본은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원래 자리에는 똑같은 모양의 현무암을 깎아서 만든 의자가 놓여있다.
회당 유적에는 메두사 즉 뱀 모양의 여신이 발견되는데 이는 로마 점령하의 팔레스타인에서 헬라문화가 용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회당의 정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으며, 회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예루살렘 성전처럼 매 3번째 계단을 넓게 만들어 불규칙하게 하였는데 이는 예배시간에 늦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계단을 뛰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한다.
고라신의 역사
고라신은 갈릴리 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비탈에 자리잡고 있으며 넓이가 3만평에 이른다. 가버나움과 벳새다와 더불어 삼각형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고인돌이 산재한 것을 보면 고대에도 주거지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라신은 주후 1세기에 벳새다와 프톨레미 도로와 인접 무역로를 끼고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으며, 주후 135년에 번성하였고, 주후 3세기에 가장 번성하였다. 주후 3세기에서 4세기 비잔틴 기독교 시대가 도래하던 때에도 이곳은 여전히 갈릴리에 있는 유대교의 중심도시 중 하나였다. 이 시대에 2개의 유대교 회당이 지어졌고 그 크기는 길이 23m, 폭이 17m나 되고 2층으로 지어진, 요즘에 보기에도 커다란 건물이었다. 회당은 안식일 거리를 고려하여 건설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상당히 큰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곳에서 주후 3-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주요 주거지와 4-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회당의 부속 건물들 제식용 목욕탕인 미크바(Mikvah)를 볼 수 있다.
고라신의 교훈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자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되 저희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문안 받는 것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려주시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다.(마 23:12) 전부는 아니겠지만 당시 회당에는 상석이 있었고 그 상석을 모세의 자리라고 했던 것 같다.
오늘날 폐허로 변한 회당과 고라신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풍성한 삶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 섬기는 자는 섬김을 받으리라.” 고라신 그 황폐한 곳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꼭 가보아야 될 황폐하지만 아름다운 곳이다. 일정상, 형편상 고라신을 찾지 못하는 이들은 갈릴리의 아름다움만 느끼고 고라신의 폐허 속에 피어있는 말씀의 꽃을 보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는 2005년 9월 17일 이집트 룩소에 있는 왕가의 골짜기와 카르낙 신전을 방문하였다. 카르낙 신전의 기둥들은 찬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함과 정교함이 돋보였다. 거대한 신전의 모습 속에서 찾은 교훈은 인간의 교만함과 문화의 허망함이었다. 고라신은 룩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주님의 사랑과 책망이 머물렀던 곳이라 룩소의 카르낙 신전보다 더 애착이 간다면 빈 말일까?고대 고라신은 폐허가 되었지만 고대 고라신에서 북서쪽으로 2km쯤 떨어진 언덕에는 신 고라신이 있다. 이름대로 나무도 많고 꽃도 많은 아름다운 동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