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묘비명에는 ‘1862년 죽었다’ 라고 씌어 있었다. 어떻게? 왜? 아무런 설명이 없다. 26세의 청년이다. 미국 프린스턴 태생이고, 선교사로 터키를 왔다.
그 당시 터키는 오스만제국의 끝자락에 있었다. 무슬림들의 기독교인 탄압이 극심할 때다. 역사적으로 보면 무슬림정권은 기한을 정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라고 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난민되어 세계 각국으로 퍼졌다. 그러나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믿음도 조상의 땅도 지키고 싶었다. 고난과 박해를 무릎쓰고 그들은 그 땅을 지켰다. 그런 그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이 묘비의 주인들이 그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19세기에 미국의 청년들은 세계선교의 꿈을 꾸며 터키로 아프리카로 남미로 아시아로 그리고 한국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그렇게 선교의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황혼 무렵 가지엔텝 도시의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칼레(옛날 높은 성벽터를 일컬음)에 올랐다. 사방에 수없이 보이는 모스코에서 때마침 아잔이 울렸다. 그들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칼레에 있는 어느 누구도 아잔에 맞춰 기도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젊은이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할 뿐이다.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도 아잔소리에 미동도 없었다.
필자는 한 구석에 홀로앉아 있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한국인이라고 하는 말에 그는 호기심 섞인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띄엄띄엄 손짓, 눈짓으로 대화하며 가지고 간 스마트폰에 저장된 가족 사진들을 소개하며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후, 그 형제가 묻고 싶었던 것을 마침내 물어왔다. 한국인이 왜 좋은 관광지가 많은데 이런 시골마을에 들어 왔냐고, 자기가 좋은 관광지 알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아! 그 시간은 주님이 기다리신 시간. 나는 그 시간을 위하여 지난 수개월간 기도하고 선교비를 마련하며 준비하였다. “형제여!” 나는그리스도인이라고. 나는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는 예수를 알고 있었다. 예수는 훌륭한 이맘(무슬림의 종교 지도자) 중 한분이고 자기들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 했다. 그는 자기는 알라를 믿는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예수를 한번 알아보고 공부해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는 한국인이 자기 동네에 온 정성을 생각했는지 탐탁치 않아 하는 눈치였으나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그에게 그들의 언어로 된 신약선경을 건네 주며 읽어 보라고 했다. 반드시 인생 문제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신약을 권했다. 무슬림들은 거저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물이라 생각하는 것을 받으면 자기도 꼭 무엇이든 답례를 하려고 한다. 그는 신약을 받고는 자기 팔목에 매여 있던 문양이 있는 실로 짠 팔찌를 풀러 내 팔목에 매어 주었다. 필자는 그와 그렇게 대화하다가 내가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데 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의 손을 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렸다. “사랑의 하나님! 이 영혼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알라에게 묶여 있지만 그의 손에 쥐어 준 이 성경으로 인해 그가 예수님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깨닫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 영혼이 불쌍하여 나는 눈물로 기도했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임을 믿었다. 필자는 이렇게 무슬림 땅에서 선교의 발자국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