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신년 주일 친교 때 다리를 다쳤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종아리입니다. 짧고 두꺼운 종아리여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깟 제기차기 두 번에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웃자고 얘기하는 것처럼 상품에 눈이 어두워 다리를 무리하게 뻗은 적도 없고 그냥 얌전히 서서 제기를 찬 것뿐인데, 열한 개를 채 채우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때문에 결국 게임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다리를 끌고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이는 못 속여~ 까르르 까르르..."
요즘 여기 저기서 신호가 옵니다. 움직이기만 하면 삐걱대고, 힘만 쓰면 튕겨져 나오고 또 붓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을까..."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몸을 잘 돌보지 못한 저의 불찰이 큽니다. 나이가 들수록 상체는 무거워지고 다리는 얇아져서 하체 근육 운동이 필요하다는데, 운동은 고사하고 잠도 충분히 자질 못하니 어쩌면 이렇게 여기 저기 신호가 오는 것이 오히려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엔진 보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에선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보링이라는 작업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인지, 주변에서 보링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오래전 한국에는 엔진 보링한다는 공업사 간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엔진을 오래 사용하면 피스톤 운동을 하는 실린더 벽이 마모가 되어 헐거워지게 되고 그러면 압축 공기가 그 틈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힘을 제대로 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럴 때, 실린더 벽을 오히려 더 깎아내고 더 큰 사이즈의 실린더로 교체함으로 엔진이 가지고 있었던 원래 힘을 내도록 돕는 작업을 보링이라고 부릅니다. 문득, 우리 신앙생활에도 보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 생활의 가장 큰 적을 신앙의 예식화라고 생각합니다. 정해 놓은 때, 정해 놓은 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 그렇게 예식을 의존하는 신앙은 메마를 수 밖에 없고, 은혜라는 윤활유가 없는 반복적인 예식은 결국 믿음의 벽을 마모시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헐거워진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예식화가 아닌 일상화가 필요합니다. 날마다 주어진 하루를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마음을 따라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살아내는, 그렇게 습관적이지 않은 신앙의 일상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지금 이층 소예배실에 공사가 진행중입니다. 성경공부를 할 교실이 모자라 그동안 학생들이 이곳 저곳을 전전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공사가 끝나면 그런 걱정은 좀 나아질 듯 싶습니다. 건물에도 보링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거하려 하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은 없습니까? 몸 이곳 저곳에 신호가 오지는 않습니까? 보링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