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가는 길
여리고(Jericho)는 요르단 강 서안에 있는 BC 10,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예루살렘 북동쪽 22.37마일(36km), 요르단 강과 사해가 합류하는 북서쪽 9.32마일(15km) 지점에 있으며 지중해 해면보다 820피트(250m)나 낮다. 쿰란에서도 가깝고 1번 국도와 이스라엘 남북을 이어주는 90번 도로 상의 중요한 지점이다.
순례객들은 대개 사해지역 쿰란에서 북상하면서 만나는 곳이고, 요르단에서 느보산(Nebo Mountain)을 거쳐 알렌비 국경(Allenby border)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각종 과실수(특히 종려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로, 예로부터 종려나무 성이라 불려왔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한 여리고는 만년 된 구조물이 발굴 되어진 것으로 미루어 도시 역사를 만년으로 생각한다. 연중 강우량이 100mm에 불과한 사막과 농경지의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이지만 주변에 6개의 샘을 통하여 충분히 물이 공급되므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었다.
◈고립된 여리고
본래 요르단 영토인 여리고는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후 줄곧 이스라엘이 장악하고 있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자치도시 중 하나로 이스라엘 점령에 맹렬히 싸우는 지역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출입금지 지역이고, 외국인들도 검문소를 통하여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2000년 9월 28일 2차 인티파터(팔레스타인 무장봉기)로 인하여 한동안 여리고는 일반인들이 출입하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 2004년 10월 아라파트 사망이후 팔레스타인에는 새로운 지도자 아부마젠이 선출되었고 매일같이 일어났던 이스라엘 테러도 멈추었다. 이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새로운 평화의 기운이 감돈다.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 곳곳마다 보안장벽이라는 9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지기는 했어도 이전보다는 훨씬 좋은 분위기인 것 같다. 이제는 여리고를 일반인들도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리고는 고립된 상황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포위망 속에 있다.
◈성경에 나오는 여리고
성경 속 이름은 여리고이며 현지 아랍인들은 아리하라고 부른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BC14세기경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여리고성이 함락되었다(여호수아 6장). 신약시대의 여리고는 구약시대의 여리고보다 남쪽 3.7마일(6km)쯤에 있는 툴룰·아브엘 알라이크라고 부르는 폐허이다. 이곳은 헤롯 대왕의 겨울궁전이 있던 곳이며, 세리 장 삭개오의 회심과 구원이 이궈진 곳이라고 한다.
여리고는 하나님께서 홍해와 요단강을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인도하셔서 처음으로 정복케 하신 도시이다. 이스라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수기인 요단강을 건너서 이 도시에 접근하였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본 사람은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다.
학자들 중에는 라합은 기생이 아니고 달 신을 섬겼던 여리고 신전에서 봉사하던 여 사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라합의 신분이 어떠한 가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위치보다는 그 사람의 믿음의 모습이다. 언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도 라합은 들려오는 소문의 소리만 듣고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참 귀하게 보인다.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오직 한 분뿐임을 고백하였고, 그 고백은 그녀의 가족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았고 라합은 유대인이 아니면서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위대한 성경상의 여인으로 이름을 남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 함락 작전 명을 받았는데 오직 성 주위를 매일 돌되 엿새 동안하고 7일째는 7번 돌며 제사장이 나팔을 불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 밖에 다른 방법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직 순종으로 이 말씀 들고 나아 갈 때 견고한 진이 무너졌다. 오늘날 여리고성 무너진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텔에스 슐탄이라고 부르는 곳이 고대 여리고성이다.
일찍부터 여리고는 달 신을 섬겼던 종려나무 성읍이었고 주변에 산재한 샘들을 통하여 풍부한 관계 농업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주변에 다른 마을보다는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하였고 견고한 성벽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때문에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로서는 여리고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함락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겠지만 하나님은 한 가지 방법 오직 기도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능력을 보라는 것 밖에 다른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오늘날 여리고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보는 현대인들은 겨우 이것 가지고 하지만 3,400년 전의 문화는 그게 아니었음을 알아야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할 때 보았던 거창한 구조물을 본 사람은 여호수와와 갈렙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곳에서 교훈을 삼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것이다. 언약궤가 항상 앞서 갔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수6:4) 무너진 언덕 위에서 서쪽을 보게 되면 벌거숭이 산 하나가 보인다. 바로 이 산 넘어 유대광야에서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를 하셨고(마4장) 기도 후 우리가 보는 산 정상부근에 보이는 헬라정교회(주후 6세기 건축)가 있는 곳에서 마귀의 3가지 시험이 있었는데 돌덩이를 떡덩이로 만들라고 하는 첫 번째 시험을 신명기 8장3절의 말씀으로 물리쳤다 이 말씀이 바로 이스라엘 여리고 함락작전의 뜻에 대하여 설명해준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말씀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리고의 고고학
처음으로 성벽이 건축된 것은 이 도시를 열망하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수아의 정복이 주전 1,400년 전에 있었고 이후 주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될 때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가 눈을 뽑힌 채 잡혀가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이후에 페르시아의 행정도시가 되었으며 주전 336년 알렉산더의 권력자들에 의해 물이 독점되자 점차 도시가 황폐하게 된다. 헤롯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세를 주고 샘을 사용하다 그녀의 사후 여리고를 차지하고 겨울 별장을 건설한다. 헤롯은 여리고 언덕 위에 어머니를 기념한 요새를 만들었는데 “싸이프러스“라고 부른다. 헤롯 사후 아켈라오에게 소유가 넘어갔다. 아켈라오는 종려나무를 많이 심어 소득을 얻었다. 유대전쟁시 로마 10군단의 본부가 되었고 비잔틴 시대에는 수도사들이 살았고, 순례객들이 몰려오기도 하였다. 십자군시대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후이다.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에 의해 BC 10,000년경으로 측정된 먼 옛날에 중석기의 수렵민들이 찾아왔으며, 그들의 후손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정착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BC 8000년경에는 주민들이 마을 주위에 거대한 돌로 벽을 두르거나, 적어도 어느 한 곳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거대한 돌탑을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조직된 공동체로 발전해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던 마을은 도시라는 용어에 걸맞게 규모가 컸으며, 주민은 약 2,000~3,000명에 이른 듯하다. 이 1,000년 동안에 생활방식은 수렵생활에서 완전한 정착생활로 발전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농업이 발달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여리고(Jericho)’라는 지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 나팔소리, 무너지는 성벽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믿음과 승리의 놀라운 이야기이지만,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을까? 회의론자들은 아니라고 말하며, 단지 여리고의 유적을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의 주된 이유는 1950년대에 영국의 고고학자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이 지휘하여 수행한 현장발굴의 결과 때문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공격이 있었음에 틀림없는 후기 청동기 시대(Late Bronze Age)에 도시성벽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발굴에서 여호수아서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는 여리고 성벽의 파괴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보이지 않는다.”
캐슬린 케년의 발굴 보고서를 편집하고 공동 저술했던 토마스 홀란드(Thomas A. Holland)는 나타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군사적 정복설과 후기 청동기 시대의 성벽에 대한 참고자료들을 가지고 캐슬린 케년이 내린 결론은, 청동기 말기(BC 1400)에 도시가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는 설을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고고학적 자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세기 동안 계속 수집되어온 고고학적 증거들을 주의 깊게 조사해보면, 이것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