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근본을 갖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기뻐할 이유가 있어야만 기뻐하지만 우리는 기뻐할 이유가 전혀 없어도 기뻐할 수밖에 없다. 기쁨은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32:11)라고 우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라고 말씀하신다.
기쁨이 우리의 의무임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은 요시아 왕 때 왕족 출신인 기쁨의 선지자 스바냐(히스기야 왕의 현손)이다.
그는 그의 저서 스바냐 3장 14~17절에서만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라는 단어를 6번 사용하신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구원받은 우리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의 핵심도 기쁨이다. 그러므로 기쁨의 삶은 우리의 의무이다. 기쁨을 잃으면 성령의 역사도 멈춘다. 성령 충만은 기쁨 충만으로 나타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있다.
기뻐한다는 것은 기질이 명랑한 사람들이나 택할 수 있는 그런 선택적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손으로 빚으셔서 만드신 인간들이 희락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일시적으로만 기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살전 5장 16절에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 일시적인 기쁨이 아닌 항상 기뻐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를 원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울한 얼굴을 보이는 것은 모순이다. 그래서 J. W. 샌더슨은 “우울한 얼굴을 하나님께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신론과 같다”고 했다. 느헤미야 선지자는 8장 10절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살아갈 힘이 오직 여호와를 기뻐하는 데서 온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을 주시는 분이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 기쁨처럼 잠시 잠간 있다가 없어지거나 빼앗기는 기쁨과는 달리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불안하고 부족하다. 왜냐하면 빼앗길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성경은 빼앗기지 않는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을 가졌기에 사형수로 옥에 갇혀 있었던 사도 바울은 항상 기쁨이 충만할 수밖에 없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