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경기를 하면, 반드시 한 쪽은 이기고 다른 쪽은 진다. 특히 복싱 경기처럼 두 사람이 하는 경기에서는 이런 부분이 더욱 도드라진다.
경기가 끝나면 이긴 자는 펄쩍 펄쩍 뛰며 환호하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기뻐한다. 그러나 진 자는 고개를 푹 숙이거나, 때로 뜨거운 눈물을 뿌리기도 한다.
그런 장면을 보면 왠지 모르게 이긴 자에게 승리에 박수를 보내기보다, 진 자에게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어쩌면 인생은 승리의 순간보다 실패의 기회가 많기 때문인지 모른다.
고로 이긴 자는 승리감을 조금 절제하여, 경기에 패한 후 구석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뜨거운 눈물을 뿌리고 있는 자를 의식할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따스해질 것이다.
경기에 패했다는 것은 대부분 자기 비하로 연결되고, 자학으로 인도되는 경우가 많다. 수년 내지 수개월을 불철주야 오직 '승리한다'는 일념으로 고통스런 훈련을 감수하여 왔기 때문이다. 고로 승자가 패자에게 다가가 꼭 껴안아주고 위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이유는, 영원한 승자란 없기 때문이다.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항상 갈등 관계였다. 황제와 교황의 지도력에 따라 어느 때는 황제가 우세했고, 어느 때는 교황이 우세하곤 했다.
1077년경 황제와 교황은 모두 야심찬 사람들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약관 24살로 패기만만한 나이였고, 이제껏 어머니의 섭정으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대단했다. 또한 황제의 잃어버린 영토도 회복하고 싶었다.
교황 또한 대단히 외골수적 성품의 강인한 개혁자였다. 이전 교황들은 왕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자신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성직자들이 왕권과 결탁하여 부패했으니, 그것을 개혁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폐위돼 독일로 유배되어가는 그레고리 6세를 따라갔던 교황의 보좌관 출신이었다. 그러니 속으로 약하기만 한 교황권에 대해 얼마나 울분을 토했을까?
그는 클리니 수도원의 일원으로 교회 개혁에 앞장섰던 수도사였다. 세속적인 간섭을 물리치고, 독립적인 수도원을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즉 지역 영주와 결탁하여 성직을 매매하고, 처자식을 거느린 수도사들에 대해 철저하게 개혁하려고 했다. 이런 청빈한 수도회는 많은 제후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하인리히 3세의 열렬한 응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교황에 오른 레오 9세는 이런 힐데브란트를 로마로 불러 교회개혁 운동을 맡겼다. 강직하고 완고한 힐데브란트에게 교회개혁 운동의 책임을 맡긴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힐데브란트의 리더십은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후에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알렉산더 2세에 의해 그레고리 7세로 교황에 취임하게 되었다.
교황직에 오른 그는, 교황이 세상적인 황제나 제 후보다 우월하다고 선포했다. 또한 개혁의 의지를 굳게 다짐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황제의 주교 서임권이었다.
당시 각국의 주교 서임권은 해당 국가의 왕들이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주교들은 교황의 말보다 왕의 눈치를 보았고, 이런 행동은 곧 교회를 타락하게 만드는 지름길로 여긴 그는 왕에게서 주교 서임권을 박탈하려 했다.
이런 개혁운동은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는 황제 하인리히 4세로 독일의 통치자였다. 독일은 오랫동안 제후들이 대대로 물려받는 영지가 있었지만, 황제에게는 봉토가 없었다. 그래서 제후들은 황제의 얘기를 잘 듣지 않았고, 황제의 힘이 강해질 것 같으면 죽이거나 갈아 치우곤 했다. 결국 황제에게 주교 서임권은 돈이 들어오는 통로였기에,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은 젊은 황제였다. 그는 그레고리 7세의 개혁안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부추겨, 교황을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아버지 하인리히 3세가 강력한 권력으로 교황을 갈아치웠듯 말이다.
그러자 교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황제를 파문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서 폐위됐음을 선언했다. 그러자 왕권 강화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제후들은 이 찬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강력한 교황을 두려워해 황제를 반대하던 제후들은 1076년 10월에 모여, 왕의 모든 상징물을 버릴 것과 교황과의 화해를 받을 때만 황제직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교황도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을 아우스부르크에 소집하여, 향후 황제의 운명을 결정하기로 했다. 궁지에 몰린 하인리히 4세는 선택의 여지 없이, 교황에게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1077년 1월, 교황은 아우스브르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 그런데 며칠 후 황제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순간 당황한 교황은 카노사성 성주였던 마틸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교황의 오랜 친구였고, 교회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여인이었다.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 줄 알고 두려워했던 교황은 황제가 자비를 구하는 고해자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077년 1월 25일, 카노사에 도착한 황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는 아내와 3살짜리 콘라드를 동행시켰다. 파문을 내린 교황의 동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그 추운 날 허름한 옷을 입고 맨발로 카노사 성문에서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교황이 머무는 방문은 전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하루가 아니라 한 달이라도 빌고 또 빌더라도 교황의 선처를 반드시 받아내야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였다. 26세의 패기 넘치는 황제와 산전수전을 다 겪은 50세 교황의 수싸움은 치열하기만 했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교황은 꿈쩍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을 극적으로 화해시킨 것은 성주 마틸다와 클리니 수도원장 후고였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베드로라면 어떻게 했을까? 용서를 구하는 자를 거절할 수 있었을까?'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베드로의 후계자가 추운 겨울날 성 밖에서 용서를 구하는 자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교황은 대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1077년 1월 28일, 드디어 문은 열리게 됐다. 황제는 교황 앞에 양팔을 십자가 모양으로 벌리고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결국 교황은 그를 일으켜 세웠고, 자신의 미사에 참석케 함으로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참으로 극적인 장면이었다. 대신 교황은 황제에게 철저히 복종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
교황은 돌아가기 전 만찬을 베풀었으나, 하인리히 4세는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아마 마음에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꾹꾹 참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상대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데, 그에게 너무나 잔인하게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로 돌아간 황제를 제후들은 받아들였고 황제는 힘을 길렀다. 그러던 중 작센 지방의 영주들이 대립 왕을 세웠다. 분노한 황제는 작센 지방으로 쳐들어갔고, 그들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이 이내 황제를 파문하자, 황제는 곧 군대를 거느리고 로마에 쳐들어왔다.
교황을 보호하는 것은 왕들의 의무였는데 왕이 교황을 공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를 점령한 왕은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를 산타 안젤로(Santa Angelo) 성에 구금했다. 그리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를 후임 교황으로 추대했는데, 그가 바로 클레멘스 3세다. 클레멘스 3세는 감격하여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머리에 번쩍이는 관을 친히 씌워주었다.
산타안젤로 성에 구금된 폐위된 교황은 자신을 구하러 온 노르만 사람 로베스 가스카르를 따라 나폴리 아래 살레르노로 망명해야 했다. 노르만인은 바이킹족으로, 전에는 도둑질을 일삼던 족속이었다. 그런 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교황은 1년 후 1085년 가슴에 한을 품고 거기서 쓸쓸하게 죽었다. 그리고 살레르노의 카테랄레(Catterle del centro storico) 성당에 밀랍으로 만들어져 관에 뉘어졌다.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망명지에서 죽노라."
교황이 힘이 있었을 때, 카노사에서 자신에게 용사를 비는 젊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좀 더 따뜻하게 대접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하룻밤 정도 밖에서 떨며 용서를 빌게한 뒤, 이튿날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친히 맨발로 나가 껴안고 함께 아파하고 좀 더 따뜻하게 맞이하였더라면..., 승자로서 패자를 동정할 수 있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살레르노로 유배 가서 거기서 쓸쓸하게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승자는 결코 패자로 하여금 한을 품지 말게 해야 한다. 잔인하게 승리하지 말아야 한다. 카노사의 역사는 이 큰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