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한국 뉴스에서는 “김영란법”이라는 새로운 법에 관하여 뜨거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김영란법은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직원을 포함한 공직자가 직무 관련성과 상관없이 일정 금액을 초과하는 금품과 대접을 받았을 때 형사 처벌을 받게 되는 법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법은 2011년에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제안하였다 하여 그 이름을 따서 김영란법이라고 붙여졌으며, 2015년 3월 3일에 국회를 통과하였고 1년 6개월간 유예기간을 거쳐 이제 2016년 9월 시행되게 된 것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접대와 섬김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단어이다. 무엇보다 모처럼 전화를 걸어온 친구나 친지에게 처음 건네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밥 한번 먹자”라는 정다운 말이다. 물론 김영란법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부정부패 관행을 끊기 위한 중요한 법이기는 하지만 왠지 우리의 마음에는 이 법에 관하여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오래전부터 실천되어 왔던 섬김과 접대의 모습과 김영란법의 반대적인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이다.
우리 사회에서와 그리스도인들의 문화 속에는 접대와 섬김의 문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주체가 주장하는 섬김과 접대의 개념은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특별히 우리는 본문 2절에서는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멈추게 된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손님들을 여호와로 알아보고 맞이했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헌신을 한 걸까? 궁금한 마음을 감출 수 없게 된다.
특히,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 말씀을 읽을 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울컥하고 감동스러웠다. 이렇게까지 기꺼이 헌신을 하는 모습이 몸에 배려면 얼마나 많은 인내의 시간들이 있었을까? 퍼주어도 받은 줄 모르고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속상하고 배신감을 느꼈던 많은 순간들이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다가도 반사적으로 튀어나갈 수 있을 만큼의 헌신적이고 겸손한 태도로 살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었을까 생각이 잠기게 된다.
아브라함의 모습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세상 속에서 행해지는 접대와 섬김에는 언젠간 그것이 충분한 보상과 대가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섬김과 접대에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신약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형적인 특징은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 목록에 들어 있었고(딤전 3:2; 딛 1:8),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사랑의 표현으로 후한 대접을 해야함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롬 12:13; 벧전 4:9).
그런데 성경에서 “대접하기”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낯선 자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말하는 대접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대가를 기대한다는 의미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 한다. 사랑은 도리어 상처를 싸매어 주고 새로운 자아를 찾게 하며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접대와 섬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감동에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눠주신 사랑의 정신을 기억하며 서로를 사랑과 긍휼로 접대하고 섬길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