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으로 시작 했지만 요셉의 인생의 시작은 구덩이였습니다. 그를 죽이려했던 형들의 음모때문 이었습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에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려서 애굽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나 인생은 바닥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다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노예보다 더 깊은 바닥인생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덩이, 노예, 감옥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은 환경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에 처하게 되면, 자신의 비참한 환경에 초점을 맞추어 기도합니다.
대부분 험난한 환경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는 간절한데, 내용은 자기 자신의 환경변화에 대한 부르짖음입니다. 물론 고난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형편이 나아진 상황에서도 계속 환경에 대한 부르짖음만 있다면, 이런 신앙은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환경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했습니다. 환경은 노예인데, 관계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모습입니다. 감옥에서도 환경은 감옥인데, 관계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자신의 위치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관심이 더 컸습니다. 요셉은 위치 때문에 교만해지거나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총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쓰임 받는 종이라는 의식을 잃지 않았습니다. 양육이란 성도의 삶의 상황과는 별개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먼저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설령 바닥이라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면 그것이 부흥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환경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환경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확신이 있기를 바랐던 사람의 고백입니다. 성도가 때론 바닥이나 정상이나 어디에도 놓일 수가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에 대한 판단도 현재의 위치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관계로 해야 합니다.
양육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삶에 고난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되지못했지만 바른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된 인도하심 때문 일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광야의 40년 동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광야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두려워하거나 광야라는 환경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설령 힘든 광야라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축복의 장소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만이 신앙의 진정한 싸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