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해방을 위해 혁혁한 공로를 세운 YWCA도 YMCA와 같은 목적으로 1857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 YWCA가 시작된 것은 3·1독립운동 이후 여자전문학교와 중학교 안에서 비롯되었다. 1922년 6월 전국여자하령회(夏令會)가 개최되었을 때 조선여자기독청년연합회 기성회가 발족되었다. 이듬해 8월에 서른네 지방 YWCA 대표들이 모여 서울 협성여자성경학교에서 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선출했으며 이어 1924년에 세계 YWCA에 가입하여 정식 회원이 됐다.
한국의 YWCA 운동은 YMCA와는 달리 순수히 한국 여성들에 의해 창립되었고 주도되었다는 특성이 있다. 물론 시기적으로 YMCA보다는 늦게 창설된 원인도 있었지만 3·1독립운동 이후 한국에 일고 있는 강한 민족주의 경향으로 외국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체 힘으로 민중계몽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열의가 내포되어 있었다.
YWCA 창설 목적은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믿게 하며, 온 인류는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됨을 인정케 하고, 구세주 예수의 교훈을 자기 생활에 실천하게 함으로써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두고 있었다. 여성운동, 청년운동, 기독교운동, 회원운동 등을 특징으로 꼽는다. 또한 YWCA가 주안점을 두고 한 사업의 첫째는 종교적, 교육적 출판물 간행이었고, 둘째는 음주의 해독에 관한 교육 및 금주운동, 셋째는 공창반대운동 등이었다.
수양회, 하령회, 금주·금연운동, 생활개선운동, 공창폐지운동, 물산장려운동, 여성지위향상운동 등과 지방에서 올라온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목욕탕 설립운동, 특히 농촌 지역의 여성교육 등 한국 여성의 인권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YWCA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공헌한 업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의 청년활동은 YM., YW. 이 외에도 엡윗(The Epworth League) 청년회와 면려청년회(勉勵靑年會)가 있다. 엡윗청년회는 감리교회의 청년단체로 1889년 미국 오하이오(Ohio) 주 클리블랜드(Cleveland) 감리교회에서 처음 시작된 운동이다. 엡윗(The Epworth League)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고향이다. 이 운동이 조직된 취지는 복음선교와 사회봉사라는 두 가지 목적에서였는데, 곧 미국 내 모든 감리교회로 퍼져 나갔다. 한국에서 엡윗청년회가 조직된 계기는 1897년 5월 미 북감리회 제13회 한국선교연회를 주재하기 위해 내한한 조이스(I.W.Joyce) 감독의 승인이었다. 주한 선교사 존스(G.H.Jones)를 총무로 임명하고 노블(W.A.Noble)을 위시하여 5인을 지도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엡윗청년회의 최초 조직은 동년 5월 정동감리교회에서 15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 25명과 여자 11명으로 창립되었다. 그 뒤를 이어 평양 서문안, 아영골 등 전국의 감리교회 안에서 조직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선포되면서 서울의 상동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엡윗청년회가 애국운동에 나서자 친일 경향의 해리스(M.C.Harris) 감독은 교회단체의 정치 참여란 이유로 1906년 해산을 명하였다. 그 후 여러 교회의 끈질긴 요청에 의해 엡윗청년회는 1920년 재결성되었다. 동년에 북감리교 산하 교회들의 연합체가 형성되었고, 1925년에는 남감리교회 산하 교회연합회가 발족되었다. 1929년에는 이 기관의 잡지인 「종교교육회보」(宗敎敎育會報)가 발간되기 시작하였고, 한동안 유형기(柳瀅基) 목사가 발간하던 「신생」(新生)을 인수하여 계속 발간하였다.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통합하여 한 교회가 됨에 따라 자연히 엡윗청년회도 하나의 단체로 통합돼 조선엡윗청년연합회를 형성하여 회장에 유형기, 총무에 김기연(金基演)이 선출되었다. 엡윗청년회는 전도가 그 목적 중 하나였지만 전도 외에도 사회봉사, 특히 국가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국가를 위해 여러 가지 애국활동을 전개하여 불신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면려청년회는 1881년 미국 오레곤(Oregon) 주 포틀랜드(Portland) 시의 회중교회 목사였던 클락(F.E.Clark)이 창설한 초교파 청년운동체다. 그러나 1889년 감리교회가 엡윗청년회를 따로 조직해 이 단체에서 나가자, 이어 다른 교파들도 자체 청년회를 만들어 나갔다. 따라서 면려청년회에는 장로교회만이 남아 있게 되어 결국 장로교회 청년단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국에서 이 운동 역시 선교사들에 의해 1916년경 서울 새문안교회, 승동교회, 평북 선천의 북교회 등에 면려회(勉勵會)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정식으로 출범하지는 못하다, 3·1 독립운동이 있은 후에 앤더슨(W.J.Anderson) 선교사가 경북 안동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청년들의 신앙지도, 사상 선도를 목적하고 정식으로 창설하였다. 처음에는 전도사업, 성경연구, 교회봉사 등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그쳤으나 차차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교회가 펼치고 있던 금주·금연운동, 문맹퇴치운동, 농촌 사업 등의 사회계몽 운동으로 그 활동 범위를 확대해 갔다.
1921년 6월 안동 지방에서 면려회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25개의 지회에서 600명의 회원이 회집되었다. 1921년 장로회 총회는 안동 지역의 면려회 운동이 많은 성과가 있음을 보고 각 교회에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이를 결의하였다. 선교부에서도 이 일을 적극 후원하기로 하고 앤더슨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두고 전국으로 다니며 지회 설치를 격려하기로 결정했다. 1923년 전국에 모두 200개 이상의 지회가 설립되어 전국연합회 결성의 필요를 느껴 이듬해 12월에 서울 피어선성경학교에서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 및 제1회 면려회 전선(全鮮)대회를 개최하여 회장에 박현식(朴顯植), 총무에 앤더슨을 선출하였다. 또한 기관지로 「진생」(眞生)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에는 청년운동의 권위자 이대위(李大偉)를 총무로 선출하면서 활동을 크게 확장하여 1934년에 이르러서는 지회가 1,000개가 넘었고, 회원이 3만 명이 넘는 장족의 발전을 하면서 전도와 봉사활동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