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함과 의로움을 뜻하는 그의 이름과는 반대 방향으로 너무 멀리 달려온 삭개오, 재활복구의 희망조차 일체 보이지 않던 그를 향해 다가오신 예수님의 은혜는 십자가 대속의 서곡이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 불렀다(눅19:7). 그러나 예수님은 정결함과 의로움을 담은 그의 이름을 친히 불러 주신다: “삭개오야!”(19:5) 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의 대속의 사역을 바로 앞둔 시점에 나타나는 삭개오 이야기에는 이 타락한 세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하시고, 죄인된 우리 대신 진노의 잔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된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 있다(19:11 참조).
누가는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음을 무릅쓰고 “주(Lord)”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반복하여 예수님이 삭개오 인생의 주인이 되셨음을 암시한다(19:8). 세리장은 맘몬을 하루 아침에 내팽개친다. 욕을 들어가며 모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조롱 받아가며 토색한 것 무엇이든 네 배로 갚겠다는 그의 말에서 주저함이나 아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죽은 듯 살아있고, 사는 듯 죽어있던 그의 인생 가운데 맘몬은 더 이상 경배의 대상이 아니며 위로의 근원도 아니다. 말하자면, 맘몬은 삭개오의 인생에서 철저히 비신화화 되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타락한 세리장이 이토록 변한 것일까? 어떤 가르침을 주셨기에 그와 같은 인생 대변혁이 가능했던 것일까? 도대체 삭개오의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셨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무슨 경고의 말씀을 하셨길래, 어떤 예언을 하셨길래 이 타락한 부자가 이렇게 회개하는 것일까?
한 번 재구성을 해 본다면, 아마 누가복음 내의 앞선 부분들로부터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 내용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누가복음 9장에서 19장에 걸친 예루살렘을 향한 장엄한 여정 부분에서 주셨던 가르침 가운데서 삭개오에게 하셨을 법한 말씀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적 가르침이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해 분명 말씀하셨을 것 같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주셨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 중 일부를 아마 나누셨을 것이다. 특히 청지기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은 꼭 주셨을 듯 같다. 아니면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세 가지 잃어버린 것들(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비유를 15장 1-2절에 나타나는 논쟁적 상황과는달리, 따뜻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 나누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저자 누가가 이 모두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삭개오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Lord)로 고백하기에 앞서 그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 내용이 일체 기록되어 있지 않다! 19장 7절은 마을 사람들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일로 예수님을 비난하는 장면을 생생히 묘사한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이어 8절은 일체의 추가 언급 없이 바로 삭개오의 회개 장면을 그린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 내용을 생략함으로써 삭개오의 삶에 임한 변화를 강조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현존 자체가 삭개오의 변화를 가져온 원동력임을 암시하는 듯 하다. 19:5과 19:9을 비교해서 보면 이에 대해 조금 더 확신이 생긴다.
누가복음 19:5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누가복음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가시기 전에 하셨던 5절의 말씀과 삭개오의 회개 직후에 하신 9절의 말씀은 서로 병행을 이룬다. 5절과 9절 모두 “오늘”이란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 둘 다 삭개오의 “집”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차이가 있다면, 5절은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9절은 구원이 그 집에 이르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5절과 9절을 이렇게 긴밀하게 비교하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바로 예수님의 방문이 삭개오의 구원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다. 8절에 “갑작스레” 나타난 삭개오 변화는 예수님 자신으로 인해, 예수님의 현존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구원의 인격화된 이름이다.
누가는 그가 쓴 복음서의 속편으로 사도행전 16장에서 성령을 “예수의 영”으로 묘사한다.
사도행전 16: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는 16장 6절에서 성령에 대해 언급한 후, 이어지는 7절에서 성령이 “예수의 영”이심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누가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 보좌에 좌정하시고 성령을 그의 제자들에게 보내주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통해 계속 일하고 계심을 알려 준다. 누가에 따르면, 성령의 역사는 바로 예수님의 사역이다. 성령행전(사도행전)은 바로 예수님의 행적 이야기다. 성령의 현존은 예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성령을 대면하는 이는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모신 자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현존이 가망 없어 보이던 삭개오의 변화를 가져왔듯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현존이 가망 없던 우리 영혼을 살리시고 예수를 주로 고백케 하셨으며(고전12:3 참조), 우리 주변에 있는 영혼들-종종 우리가 소망 없다고 속단하고 정죄하는 그 영혼들-을 재활복구하고 계신다.
그렇다! 현존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삭개오의 복음이다. 현존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