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모든 것이 은혜다. 그러나 결코 값싼 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지 예루살렘이 아닌, 길목에 위치한 한 소외된 영혼, 종교-사회적으로 죽은 듯이 살아가고 있는 그 영혼을 그저 지나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은혜는 십자가 대속의 서곡이다. 삭개오는 그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기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 밑으로 다가오셔서 그에게 말을 거신다. 그의 친구가 되신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때나 지금이나 죄인마저도 기쁨의 사람으로 변모시킨다 (눅19:1-6 참조).
삭개오와 친구가 되는 것이 그리고 그의 집에 들어가 유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뻔히 아셨으면서도 예수님은 보란 듯 그의 집으로 들어 가신다.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수군거린다. 랍비 예수가, 갈릴리의 그 선지자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세리장을 향한 조롱의 활시위는 이제 예수님을 겨눈다. 삭개오를 향했던 비난의 화살은 예수를 직접 향한다. 그렇게 예수님은 삭개오의 짐을 나누어지기 시작하신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분은 삭개오를 위해 그리고 삭개오와 동급 죄인인 우리를 위해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대신 지신다. 대속의 복된 그림자가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한 삭개오 이야기에 이렇게 짙게 드리워 있다. (눅 19:7 참조). 그러나 삭개오 이야기는 여기서 바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향한 삭개오의 고백을 담은 누가복음 19장 8절에는 앞선 1-7절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단어가 두 차례 반복되어 등장한다. 바로 “주(Lord)”라는 단어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눅 19:8)
먼저는 누가의 나레이션(narration) 가운데, 그리고 곧 이어 삭개오의 고백 가운데 “주”라는 의미심장한 단어가 반복하여 등장한다. 삭개오에게 은혜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등장하는 지니(Genie)가 아니다. 삭개오의 죄책감을 “신비롭게” 덜어준 후, 그 후에는 이 세리가 전에 살던 대로 살도록 내어버려 두지 않으신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이 세리 인생의 주가 되신다. 전에는 맘몬이 이 세리장의 주인이었다. 옆 집이 경험하는 생존의 위협과 이웃집이 직면한 경제적 몰락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토색하고 마구 거둬 들였다. 그렇게 맘몬을 “헌신적으로” 예배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종교-사회적으로 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자신의 인생, 회복 가능성이 유실된 것 같은 그 인생, 그러니까 사는 것 같지 않게 생존하고 있는 스스로의 인생에 얼마 간의 위로를 제공하고자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지금부턴 예수님이 그의 주인이다 (눅16:13 참조). 본래 정결함 또는 의로움의 뜻을 지닌 “삭개오”란 이름은 더는 수치와 죄악의 상징이 아니다. 이제 삭개오는 회개, 변화, 그리고 제자도의 상징이다. 이웃을 토색해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담보한 것이 이 세리의 이전 삶이었다면, 이제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처분해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삶, 이웃에게 피해 준 것은 넉넉히 보상하는 삶,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자손다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값싼 은혜를 무기 삼아 “죄인”임을 입으로는 인정하나 자신이 이웃에게 끼친 폐에 대해 책임지려는 행동이 거의 부재한 우리 가운데, 영화 <밀양>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 아직 마땅한 실천적 답변을 내어놓지 못 하는 듯 보이는 우리 가운데, 자기 죄의 심각성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 결과로 이웃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 정중히 보상하려는 이 세리의 책임 있는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다른 단어들처럼 “주(Lord)”라는 단어 역시 공허하게 사용될 수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눅6:46도 함께 참조)”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러나 누가복음 19장 8절에 등장하는 삭개오의 고백은 전혀 공허하지 않다. 그의 고백은 참된 삶의 변혁(transformation)을 수반한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눅19:8).”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삭개오는 그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다. 추가로, 삭개오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고백할 때, 그리고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다고 선언할 때, 누가가 미래시제 동사 대신, 현재시제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가의 현재시제 사용은 생생한 묘사와 강조를 위한 것이며 아울러 삭개오의 고백이 가진 진정성을 강력히 암시해 준다.
신앙생활 가운데 “주(Lord)”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다 보니 그 단어의 뜻이 퇴색해 버렸다. “주 예수님!”이란 호칭을 계속 쓰다 보니, 마치 “주”라는 단어를 예수님의 이름 (first name)쯤으로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우리 가운데 빈번하다. 하지만 삭개오가 사용했던 그 단어(“주”)는 심각할 정도로 무게 있는 단어, 무엇보다 진정한 삶의 변혁을 암시하는, 강력한 단어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 분 안에서 계시된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개인과 공동체의 주인이심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어떤 인간, 어떤 신화화된 존재, 어떤 우상도 더는 주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은혜로 삭개오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의 은혜로운 방문 가운데 십자가의 복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결코 정적(static)인 은혜가 아니다. 주님의 은혜는 역동적(dynamic) 은혜다. 종교-사회적으로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삭개오마저도 소생시키는 생명의 은혜다. 너무나 심하게 망가져 재활복구가 불가능해 보였던 그 세리의 삶마저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갱생의 은혜다. 이웃들이 완전히 포기해 버린 이의 인생마저 예수의 참 제자로 변화시키는 새창조의 은혜다. 당신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바로 이 은혜가 맞는가? (딛 2:14 참조)
그렇다. 모든 것이 은혜다. 그러나 결코 값싼 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