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모든 것이 은혜다.” 하지만 막연하고 추상적인 “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중대한 사역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삭개오라는 한 영혼, 종교-사회적으로 가망 없어 보이는 그 영혼을 찾아가시는 주님의 은혜가 실로 감미롭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는 가망 없어 보이던 영혼에게 기쁨을 선물한다 (눅19:1-6). 하지만, 삭개오 이야기는 거기서 바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교제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분명 아셨다. 그는 이미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악명의 폐해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대놓고 삭개오와 교제하신다. 니고데모(요3:1-2 참조)처럼 밤늦게 찾아가 몰래 대화하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버젓이 보는 앞에서 삭개오의 집으로 당당히 행진한다. 비난의 독화살을 맞을 줄 알면서도 뭇사람이 볼 수 있도록 당당히 걸어서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예수님은 그렇게 또 한 번 “위험한 행동”을 반복한다.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바리새인들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그 일을 감행한다. 동족의 배신자, 세리와 교제한다. 삭개오와 친구가 된다면 그와 동급 죄인으로 취급 받게 된다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으셨건만 굳이 고집스럽게 그의 집에까지 들어가신 것이다. 어쩌면 열심당원들이 이 기회에 예수님을 제거 대상 목록에 추가했을 수도 있다. 민족 배신자의 절친이니 말이다.
누가복음 19:2는 삭개오가 받았던 비난을 “세리장”과 “부자”라는 단어를 통해 암시한다. 과도한 세금징수로 동족을 착취하고 토색하여 삭개오는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 (19:8참조). 앞서 세리장은 아마 군중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생각할 때 그 사이를 비집고 나갈 용기, 그러니까 혈루증 앓던 그 여인이 가졌던 그 용기를 차마 내지 못했으리라.
이 부자 세리에게도 이름은 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정결함과 무죄함을 뜻하는 이름, “삭개오”는 이 놈의 세리에게는 도통 걸맞지 않다. 그는 탈북자들의 정착금을 노려 전문적인 사기행각을 벌이는 인간들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마약을 팔아 거부가 된 부류들만큼 종교-사회적으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역겨운 존재다. 그렇기에 이웃들은 “죄인”이란 말로 세리장의 이름을 대신한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19:7 [개역개정])
뭇사람이 보고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죄인의 집에 그가 들어갔군, 거기 묵으려고 말이야.”(눅19:7 [사역])
문제는 더는 삭개오만 비난의 대상이 아니란 사실이다. 동네 사람들의 불평은 이제 예수님에 대한 불평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그 수군거림은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예수, 괜찮은 랍비인 줄 알았는데, 밥 얻어 먹을 곳이 없나 봐. 삭개오 같은 인간 집에 들어가다니……” “예수가 선지자인 줄 알았는데, 가짜인가 봐. 삭개오가 어떤 죄인인 줄도 모르나? 그가 선지자였으면 자신이 어떤 사람 집에 들어 가고 있는 줄 알았을 텐데……” 함께 어울려선 안 될, 낙인 찍힌 존재와의 교제는 촉망 받던 랍비 예수를 실격 대상으로 만든다. 세리와의 우정은 선지자 예수를 가짜 선지자로 만든다. 삭개오에 대한 비난이 빛의 속도로 예수님에게로 전이된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복된 대속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삭개오의 비난을 기꺼이 나누어지신 예수님이 바로 얼마 후 삭개오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그 예수님이다. 십자가의 주님은 본인의 이력서(resume)를 관리하려 삭개오 같은 부류와는 상종치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로마의 사형틀에 오른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전부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다(눅5:30; 7:34; 15:1-2 참조). 그들의 친구로서 기꺼이 오명을 뒤집어 쓰셨다. 그렇게 그들의 멍에를 함께 지셨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서부터 줄곧 살아오셨던, 다른 사람의 짐을 지는 삶의 궁극적, 결정적 표현이었다.
혹시 7절 한 절에 있는 짧은 언급 가운데 너무나 많은 것을 발견하고자 애쓰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하지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삭개오 이야기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가운데 등장한다. 예수님은 지금 어느 다른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말미에 등장하는 삭개오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 지심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신약 복음서들은 “긴 서론부를 가진 수난 기사들”란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된다. 만일 그리스도의 수난이 누가복음의 중심적 사건이라면, 그리고 삭개오 이야기가 십자가에서의 대속을 위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거의 직전에 나오는 사건라면, 이 세리장 이야기를 십자가의 빛에 비추어 읽는 것이 아마도 필연적이리라.
그렇다. “모든 것이 은혜다.” 하지만 막연하고 추상적인 “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삭개오 이야기가 들려주는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서곡이다. 겉으로는 화려함을 추구하나 내면은 논바닥이 말라 비틀어져 가는 것 같은 영적 가뭄 시대의 갈증을 반영하는 탓일까? 우리 주변에 “은혜”에 대한 많은 담론이 있다. 그러나 삭개오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은혜는 극도로 구체적인, 선명하게 인격화된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말이다(고후 13:14 참조). 십자가에서 삭개오 같이 악랄한 죄인들을 위해, 그러니까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 그 분 말이다. 그 분이 바로 삭개오의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