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러신학교 강의실에서 구약개론 수업시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참여한 강당에서 백인교수가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9장 18절 이하의 “함의 저주”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는 중에, 키가 큰 흑인 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장시간에 걸쳐서 “함이 저주 받은 것이 아니라 가나안이 저주 받은 것”이라는 견지의 한 바탕 주장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역사 속에서 흑인으로 겪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와 하나님의 사랑은 피부색깔과는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결연한 내용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민자의 땅에서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받았던 것,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종차별의 주장을 정당화시켰던 미국 개신교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들의 아픔이 절절히 전달되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토요일마다 만나서 한동안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었던 흑인친구는 “지금도 나는 백인 앞에서 마음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눈치 없는 유학생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진심을 토로한 그 흑인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립니다.
성경은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고 그것을 흉보았던 아들 함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버지의 벗을 몸을 보지 않으려고 뒤로 들어가서 옷을 덮어주었던 셈과 야벳에 대하여 분명히 축복합니다. 셈과 야벳을 축복하였으면 함을 저주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만, 노아는 함의 네 아들 중에서 마지막 아들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함의 자손이 흑인이라면, 함의 네 아들,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중에서 가나안만이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가나안이 모든 흑인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흑인이 저주를 받은 것이라면 함의 아들 넷 모두가 저주를 받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나안뿐입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나중에 여호수아 장군과 이스라엘에 의하여 팔레스타인 땅에서 대부분 쫓겨납니다.
검은 피부색을 가진 함의 자손을 향하여 그 피부색 자체가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표시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성경의 가르침과도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부색으로 저주와 축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피부색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심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입니다.
오히려 대홍수 이후에 중근동에서 처음으로 중원을 정치적으로 평정한 사람은 흑인 구스의 자손으로 태어난 니므롯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밋과 찬란한 문명은 미스라임이라고 불리는 흑인, 이집트 사람의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여명기에 고도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리더십을 감당했던 사람들은 흑인입니다. 이집트 교회 최초의 감독은 마가복음을 저술한 요한 마가입니다. 그의 알렉산드리아 전도는 흑인이었던 이집트 사람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마가의 순교 이후에 최초의 수도원장 성 안토니, 삼위일체론의 신학자 아타나시우스도 흑인의 땅에서 나온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입니다. 성경을 인종차별의 도구로 삼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위배됩니다. 성경으로 사랑을 폐지하는 것은 믿음의 본질을 포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