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 초기 교회가 행한 애국 활동 중 고종 황제 탄신 축하연을 주관한 내용이 있다. 선교사들의 애국충군 업적 중 왕실과의 관계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종의 탄신일 축하 기념예배다. 언더우드는 1896년 국왕 탄신일인 9월 2일 (음력 7월 25일)에 이를 기념하는 예배를 드릴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일을 통해 기독교가 애국충군의 종교임을 일반에게 알림과 동시에 전도 기회도 얻으려 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다 4대문 안에는 그런 건물이 없어, 서대문 밖 독립문 근처에 약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모화관(慕華館) 사용을 허락받았다. 단상을 세우고 깃발들을 달고, 배재학당 학생들을 동원해 국왕 탄신 축하 기도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선전했다. 언더우드는 밤을 새워 전도지를 만들고 기독교를 소개하는 소책자와 찬송가를 마련해 서울 전역에 뿌리도록 했다. 당일 몰려든 사람들이 전도지와 책자들을 앞 다투어 가져갔고, 먼저 가지려는 사람들에 의해 아우성이 터졌다. 특히 찬송가 중에 왕을 찬양하는 노래가 들어 있었다. 이 노래는 ‘피난처 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이리 오게’ 찬송가 곡에 맞춰 불렸는데, 그 가사의 일단은보면 다음 같다.
“당신의 전능하신 힘으로/우리 국왕 폐하는/왕위에 오르셨습니다./당신의 성령께서/우리나라를 지켜 주시며/당신이 붙들어/국왕으로 만수무강케 하옵소서
조물주요 하늘의 왕이신/유일하신 주님 당신께/우리는 찬양을 드립니다/모두가 당신께 경배드릴 때/당신의 웃음 밑에서/우리나라는 행복해질 것이며/부강하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내각 각료들을 위시해 각계각층 인사가 초청됐고 연설을 할 사람들도 내정 됐다. 주한 각 선교부의 선교사들도 모두 참석했다. 「독립신문」은 이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셔울 야소 교회 교원들이 대군쥬 탄신 경축회를 ᄒᆞ엿ᄂᆞᆫᄃᆡ 사ᄅᆞᆷ들이 근 천 명이 모혀 ᄋᆡ국가를 ᄒᆞ기를 대군쥬 폐하의 셩체 안강ᄒᆞ심과 죠션 인민의 부강ᄒᆞᆷ을 축슈ᄒᆞ고 젼국 인민이 동심 합력ᄒᆞ야 서로 돕고 서로 ᄉᆞ랑ᄒᆞ야 아모ᄶᅩ록 죠션이 ᄌᆞ쥬 독립이 되고 인민이 타국 인민과 ᄀᆞᆺ치 셰상에 ᄃᆡ접을 밧고 학문과 ᄌᆡ능이 늘며, ᄉᆡᆼᄒᆡ하는 법이 진보 ᄒᆞ야 의복 음식과 거쳐 범졀이 태셔 각국과 ᄀᆞᆺ치 되며 서로 ᄉᆞ랑ᄒᆞᄂᆞᆫ ᄆᆞᄋᆞᆷ이 극진ᄒᆞ야 누구던지 죠션 사ᄅᆞᆷ이 외국 사ᄅᆞᆷ으게 무리ᄒᆞ게 욕을 보던지 곤경을 당ᄒᆞ던지 ᄒᆞ면 젼국 인민이 ᄌᆞ긔가 당ᄒᆞᆫ 것과 ᄀᆞᆺ치 분히 녁여 그 ᄉᆞ람의 역셩을 ᄒᆞ고 님군과 국긔를 ᄌᆞ긔 목숨들보다 더 즁히 생각ᄒᆞ며 셩벽이 ᄌᆡᆼ겨 기여히 죠선도 남의 나라와 ᄀᆞᆺ치 되야 남의 나라히 일년에 십보를 나아 갓시면 죠션은 이십보를 갈 ᄉᆡᆼ각들을 ᄒᆞ며 나라 명예와 영광을 다른 일보다 몬져 생각ᄒᆞ고 모도 하ᄂᆞ님ᄭᆡ 축슈ᄒᆞ되 죠션을 불샹히 넉이셔 태셔 각국과 ᄀᆞᆺ치 복을 밧게 도와 줍쇼사 ᄒᆞ고 여러 ᄇᆡᆨ명이 일심으로 머리를 숙이고 긔도 하였다.”
우리나라가 서양 제국과 같이 선진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애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당일, 식장에는 초청된 인사들과 구경 나온 사람들로 빽빽이 찼고, 예배는 정중하게 기도로 시작됐다. 연설이 있었고 찬송가도 불렀다. 예배는 주기도문으로 끝났는데 언더우드 부인은 “그런 웅장한 소리로 주기도문이 외워지는 것을 들었을 때 전율을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언더우드는 이때의 광경을 한 잡지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회집하였고, 몇 사람의 각료들과 고위층 인사들이 단위에 좌정하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연설을 하였다. 찬송은 우렁찼고 수백 명의 군중들이 주기도문을 경건하게 외웠다. 처음부터 이 일을 지켜보았던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국가생활에 있어서 한 모델이 된 것을 입증하는 강력한 표시였다.”
국왕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림으로, 왕과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기독교가 애국충군의 종교라는, 일반국민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 주었을 뿐 아니라 이런 기회를 통해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언더우드의 혜안(慧眼)이 아닐 수 없다.
국왕 탄신예배를 통해 얻어진 구체적 결실은 황해도 은률교회가 창설된 일이다. 벼슬이나 하나 살까 하는 생각에 서울에 올라왔다 우연히 이 예배에 참석했던 한 돈 많은 양반이 전도지를 보고 크게 감동 받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가지고 왔던 돈으로 전도지와 책자를 많이 사 갖고 고향에 돌아갔다. 고향에서 열심 전도해 많은 사람이 믿었고, 마침내 그 곳에 교회를 세웠으니 이것이 은률교회다. 후에 그는 언더우드에게 은률에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요청해 언더우드는 그 곳에 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런 선교사들의 애국활동은 왕실의 특별한 관심과 호혜를 입게 됐고 특히 고종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기독교나 서구의 문명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에서 고종은 언더우드에게 전 조선을 기독교국으로 선포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으나 언더우드는 정중히 이 제안을 거절했다. 기독교 선교는 왕명에 의한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고 한 영혼, 한 영혼에 호소해 개종시키는 원리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치적 문제에 직접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는 교회 역사의 교훈이다. 교인 개인이 정치에 관여하거나 직접 정치가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조직적으로 정치운동을 하거나 정치에 압력 단체가 되는 것은 분명히 교회의 본분에 어그러지는 일이다. 따라서 선교사 개인이 국왕과의 인간관계에서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고 국왕을 돕는 일은 선교사이기 이전에 어려움을 당한 이를 돕는 친구로서, 또 평소에 친절을 베풀어 준 이를 돕는 기본적인 인간 본연의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을미사변 때 선교사들이 국왕을 도운 일이나 국왕 탄신 축하연은 교회의 정치문제 개입이란 문제와는 별개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