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명은 같은 기간 동안, 같은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둘로 나뉜 그들의 말은 전혀 달랐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부류의 상반된 정탐꾼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도 들었고,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의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열 명의 정탐꾼의 말을 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재연이 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을 같이 보고도 그 말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본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봅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향해 어떻게 그렇게 마음대로 보고 말하느냐? 고 상대방을 꾸짖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기 마음대로 보고 자기 마음대로 듣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그 당시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냐? 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당시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도 있고,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게 되면 예수님을 모시기 전에는 들리지 않던 설교가 들리게 됩니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유는 바로 마음에 모신 예수님을 통해 보고 듣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도 장대 같은 아낙 자손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장대 같은 아낙 자손과는 비교 할 수 없는 하나님도 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그들이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머지 열명의 정탐꾼들은 아낙 자손만 보았습니다.
그러니 연약한 자신들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능력 없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자신들의 마음에 이미 안 된다고 사탄에 정복되었는데, 어떻게 긍정적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삶에서도 하나님 없이 세상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포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만 보이고 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만 보는 사람과 문제의 정답을 함께 보는 사람의 말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의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아야만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