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기업에서 공금을 빼돌려 개인 호주머니에 슬그머니 챙기는 자들이 많다. 전관예우를 앞세워 엄청난 돈을 착복하는 사람들도 많다. 대기업 직원들이 정당한 보상과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시위를 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갖고 흥정해야 하는 서민으로 속이 상한 때가 많다.
요즘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더워서 견디기 힘든 시기에, 아이들과 어울려 비지땀을 흘리는 교사들을 보면, 너무 너무 감사하다. 그들을 위해 불가마 속에서 땀으로 샤워하면서 식사 준비를 하느라 애쓰고 있는 여성도들의 헌신을 보면,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의 상급이 큼을 얘기해 주고 싶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하늘에 속한 자는 이 땅에서 핍박받는 자이다.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가는 제자의 삶을 그렇게 규정하셨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마 5:10)',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자(마 5:11)'.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집요하게 쫓아오며 괴롭히는 것"을 말한다. 마귀가, 세상이, 악한 자들이 그렇게 한다는 게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엄청난 복이다. 죄 사함, 영생,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유업, 날마다 주시는 기쁨과 평강 등등. 이 모든 게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이다.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다.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거짓으로 만든 악한 말을 듣기도 한다(11). 실제로 제자들이 이런 삶을 살았고, 스데반이 그런 삶을 살았다. 초대교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다.
욕을 먹고, 핍박과 박해를 받고, 거짓으로 꾸민 악한 말을 들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를 갈고 부들부들 떨면서 복수할 기회를 엿볼 수도 있다. 실망하고 낙담해서 코를 석자나 빠뜨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마 5:12). '기뻐하다(카이레테)'는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서 행복에 겨운 상태를 말한다. '즐거워하다'(아갈리아스떼)는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비록 외적인 환경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 속에 우러나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길 수는 없는 게다. 그래서 콘라드 하이어스(Conrad Hyers)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들'이라고 한다.
욕을 먹고, 박해와 핍박을 받고, 거짓말로 누명을 뒤집어쓰고, 악한 말을 듣기도 하는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신다. 그럴 때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11)" 그것 때문에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2)".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그러니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이다. 대학교수로 봉직하면서 온 교회 성도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분이시다. 교회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 서서 하셨다. 자기 집보다 교회 일을 먼저 생각하시던 분이시다. 피아노를 전공하던 딸이 있는데, 딸에게는 피아노를 사 주지 못하면서 교회 먼저 사 놓으실 정도로 헌신적인 분이시다.
신년이 되면 어김없이 1-3일 온 가족을 이끌고 기도원에 가서 한 해를 기도로 출발하신다. 저녁이면 온 가족이 모여 하나님께 가정예배를 드린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우선, 교회 우선, 목사님 우선으로 사역하셨다. 그러니 온 성도들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섬기시던 교회가 건축을 하게 되었다. 당시 장로님은 건축위원장을 맡고 계셨다. 그런데 건축업자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교회 건축에 어려움이 생겼다. 교회적으로 큰 시험거리였다. 급기야 건축위원장을 맡고 계시던 장로님이 그 책임을 모두 짊어졌다.
그로 인해 집을 팔게 되었고, 대학교수 봉급도 차압에 들어갔다. 결국 온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장로님과 아내는 처가에서 생활했고, 둘째와 셋째 남매는 이모 댁에서 각각 살게 되었다. 피아노를 배우던 딸은 아버지의 친구인 음악선생님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아이지만, 피아노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권사님이신 아내 역시 하나님을 엄청 사랑하던 분이고, 교회 일이면 전적으로 헌신하신 분이셨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충성하던 아내가 백혈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가족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 충격으로 딸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고, 아들은 천주교로 옮기기까지 했다. 물론 훗날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런 사건들은 어린 시절 자녀들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었고, 그들의 신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딸은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반주를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불평이 나왔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겼던 가정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로님에게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자신의 유익을 돌아보지 않고 헌신하던 장로님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더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그게 장로님에게는 불편했다. 교회는 목사님 중심으로 서 가야 하는데, 장로님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님은 갈등이 되었다.
그 즈음 장로님에게 어느 대학교에서 국제학부 부교수로 오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40평 아파트도 준다고 했다. 집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던 장로님 가정에는 너무나 큰 희소식이었다. 주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신 장로님에게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신 것이다.
한편 갈등하던 교회 문제도 홀가분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 부임하게 될 대학교의 총장님이 어느 교회 장로님이신데,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섬기는 교회로 오라는 게다. 장로님은 기도하는 중 그게 교회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유익하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교회를 옮겨서 새롭게 섬겼다.
때때로 교회에서 앞장서서 섬기다 보면 이런저런 욕을 먹기도 하고, 어려움과 시련을 겪기도 한다. 그것으로 인해 개인뿐 아니라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일군들을 결코 잊지 않고 보상해 주신다.
어쩌면 이 땅에서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말씀한다.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어떤가?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누리는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는데.
이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땅에서 누리는 보상을 바라보고 살 건가, '하늘'에서 누리는 상급을 바라보며 살 건가? 사람들의 위로를 기대하며 살 건가,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며 살 건가? 이 땅에서 다 누리려하는가, 하늘에서 누릴 것을 기다리며 살 건가?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하나님나라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가?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하늘의 상을 바라보는 자는 인내하고 기다린다. 인내와 기다림은 믿음의 속성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