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어느 시청에서 6급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아들이 있다. 며칠 전 아버지 집을 찾아가서 가정에 있는 컴퓨터 2대를 부수며 난동을 부렸다. 충분한 인지 능력을 갖고 있을 법한 사람이 도대체 왜?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버지가 주식 투자로 손해를 봤다. 궁해지자 아들에게 계속 돈을 요구했다. 어느 날 화가 난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 "제발 주식 투자를 좀 그만하라"고 난동을 부린 게다. 결국 아들은 범죄자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기가 막힌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신문이나 언론매체를 통해 전해진다. 그러니 이 정도의 사건은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변에는 상식 이하의 부모들이 많다. 자식들에게 폭행과 폭언을 하는 부모, 형편이 안 되고 능력이 안 된다고 자식들을 아무 데나 내다 버리는 철부지 부모, 의붓자식뿐 아니라 친자식까지 성폭행하는 천인공노할 아버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녀들을 방치하다시피 하는 부모도 많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해서 자식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안겨 주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그러니 자식들이 열 받고 뿔난 격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해 분명히 말씀한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그런데 현실을 보면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노하게 하고 낙담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세상에서 활보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그러니 부모들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역할과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잘 양육해서 하나님나라와 이 세상 가운데 멋진 인물로 내드려야 한다.

때때로 부모로서 한계를 느낀다. 자식을 잘 기르고 싶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인내심이 결여됨을 느낀다. 나 자신의 삶도 책임지질 못해 부끄러울 때도 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순간순간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되새기고, 하늘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의 마음을 공급받아야 한다.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살아가는 부모인가를!

한편 또다시 생각해 볼 게 있다. 주식투자를 해서 많은 경제적 손실을 입히고 그것 때문에 자식에게 타격과 아픔을 주니, 자식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버지에게 '그러지 마시라'고 권면을 해도 되지 않으니 얼마나 속상한가? 그래서 자식이 범죄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래도 조심할 게 있다. 부모에게는 부모가 걸어야 할 길이, 자식에게는 자식이 걸어야 할 길이 있다. 성경은 그 길을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비록 부모가 좀 못났을지라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행할지라도, 그래도 자식은 자식이 걸어야 할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길을 이탈한 것은 부모의 몫이고, 그것으로 인해 자식이 자식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이탈한다면 그건 자식의 몫이다. 상대방에 의해 자신이 걸을 길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가정,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 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조를 때, 아버지는 망나니와 같은 아들의 철부지 행동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자식이 집을 박차고 나갔을 때, 아버지 속은 다 탔을 게다. 자식이 허랑방탕한 생활로 가지고 간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이방인의 종이 되어 돼지를 치면서 수치스러운 삶을 살다 결국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치밀었을까?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오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당장 알아봤다. 평소에 늘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주저하지 않고 아들에게 달려가 안고 입을 맞추었다. 냄새도, 더러운 것도 상관없었다. 아들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고, 발에 신을 신겨 주었다. 자격 없는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게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살찐 소를 잡고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의 존재를 공포했다. 앞으로 누구도 무시하지 말라고 사후 조처까지 한 게다.

자식들은 유산을 둘러싸고 피 터지게 싸운다. 그래도 안 되면 법정 소송까지 간다. 형제 간에 누가 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는지를 갖고 토라지고 상처를 받는다. 이게 형제이다. 함께 즐겁게 놀다가도 배가 고프면 다른 물고기를 뜯어먹는 구피와 같다.

그러나 부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다. '가시고기' 물고기의 수컷처럼 자기 몸을 새끼들이 뜯어먹게 하면서 죽어간다.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한 게 부모다. 그래서 '한 부모가 열 자식을 거느릴 수는 있어도, 열 자식이 한 부모를 모시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자식들은 알아 줬으면 좋겠다. 자녀들에게 금수저·은수저는 들려 주지 못해도, 자식들의 행복을 생각하는 게 부모라는 걸. 자식들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걸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는 게 부모라는 걸. 탕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맞이할 수 없는 귀환도,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게 부모라는 걸.

어버이날이라고 형규와 혜린이가 돈을 모아 엄마 가방과 아빠 지갑을 샀다고 한다. 아직까지 수중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엄청 큰돈이 들었단다. 그런데 아는가? 부모는 자식이 힘들게 알바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큰돈을 쓰는 게 마음 아프다는 사실을. '얘들아, 지금 있는 지갑도 충분한데, 앞으로 10년은 더 쓸 수 있는데, 1-2만 원짜리도 족한데 왜 그렇게 비싼 걸 샀어.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인데.' 이게 바로 부모 마음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다. 작년 12월 어머님마저 내 곁을 떠나고 보니 조금 더 깊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나는 자식일 뿐이다. 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언젠가 후회를 낳지 않길 바란다.

옛날에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 있었다. 그 고을에 원님이 새로 부임했다. 원님은 소문을 듣고 그 효자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80세 노모가 아들의 발을 씻기고 있는 게 아닌가? "효자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화가 난 원님은 그 효자를 잡아다 혼을 내 주었다. 그랬더니 효자가 말했다. "원님! 어머니가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부모나 자식이나 서로 인정해야 할 게 있다. '우리 모두 죄인이다.' 누구나 틀릴 수 있고,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누구나 엉뚱한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래서 서로 '내가 부족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한다.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 용납하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 연약함을 비난하고 정죄하지 말고, '그렇게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연민의 정을 가져 주어야 한다. 서로 연약하고 부족하기에 코칭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이끌어 줌이 필요한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