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CA 한인교회협의회(회장 나영애 목사)가 8일부터 10일까지 신광교회에서 '양화진'이라는 주제로 춘계 연합부흥성회를 열고 한국인보다 더욱 한국을 사랑했던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삶을 집중 조명, 큰 호응을 얻었다.
RCA 한인교회들은 매년 봄철에 유명 강사를 초청한 가운데 부흥성회를 통해 회원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신앙을 다져오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뉴브런스윅신학대학원 종교/선교사상사 부교수인 김진홍 교수를 초청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헌신된 삶을 집중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진홍 교수는 현재 뉴브런스윅신학대학원 산하 언더우드글로벌기독교센터 디렉터도 함께 맡고 있다. 이번 부흥성회에서 김진홍 교수는 언더우드 선교사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 선교사와 헤론 선교사, 홀버트 선교사 등 현재 양화진에 안장돼 있는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보여준 놀라운 사랑과 선교 열정을 전했다.
김진홍 교수는 먼저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삶과 관련, "안정된 삶의 보금자리를 떠나 100년도 전에 모든 것이 낙후돼 있던 낯선 이방의 땅에 와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묻었던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가 감사함을 알아야 한다"면서 "우리는 그 고마운 사랑, 위대한 사랑을 잊어서는 안되며 그들이 전해준 사랑과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진홍 교수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믿고 섬겼듯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은 그 척박했던 당시의 조선을 젖과 꿀이 흐르는 영적인 가나안 땅으로 받아들였다"면서 "미국에서 이민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 뉴욕 플러싱이 우리의 가나안이며 여기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은 여기를 제2의 양화진으로 여기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힘쓰는 자들이 돼야 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김진홍 교수가 전했던 강의 중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에 대한 강연 주요 내용이다.
언더우드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는 신학생 시절, 인도선교를 서원하고 준비하던 중 1883년에 있던 조선에 관한 선교세미나에서 1882년에 한미조약이 체결돼 미국사람들이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는데도 미국교회가 무관심하여 천삼백만 조선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조선 선교를 고민하게 된다.
인도와 조선을 놓고 갈등하는 가운데 뉴욕의 한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초빙까지 받아 고민하던 어느날 그는 '조선에 갈 사람은 없는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렸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에 조선으로 오게 됐고 당시 만주에서 번역해 들어온 신약성경이 주로 북한지방에 많이 퍼져있어 이북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한편으로 서울 정동에 있는 그의 사저 사랑채에서 조선인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새문안교회의 시작이 됐다. 그는 또한 성경번역, 영한사전, 국문법서 등을 제작 출판했고 조선기독교대학(연희전문대학 전신)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맡는 등 발자취를 곳곳에 남겨 놓았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신학교들을 방문해 조선선교에 대해 강연하며 많은 후배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파송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조선을 위해 헌신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원한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기독교대학 3대 교장을 역임했고 손자 원일한은 연세대학교 교수 및 이사로 봉직했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가문 4대에 걸쳐 7명이 안장됐다.
홀버트 선교사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들어 죽는 아픔을 겪지만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헐버트는 누구보다도 한국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다. 당시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될 무렵이었고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모든 세계나라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이 필요하였다. 헐버트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편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는 백안관 문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국제 상황은 미•일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되어있었다. 그 밀약의 내용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것을 용인하도록 되어있었다.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서는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년 추방을 당한다. 그는 40년을 헌신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에 친필로 헐버트라는 이름을 써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작년에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비어있던 묘비에 그의 이름을 써 주었다. 헐버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조선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의 묘비명은 "나는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돼 있다.
로제타 셔우드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선교사는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들어온 한국에서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사랑을 실천해 나갔다. 그녀는 홀로 평양의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다.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후에 맹인학교를 확충하여 농아교육도 시작하였다.
박점동(박에스더) 이라는 한국 여자분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만들었으며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에 경성여자 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 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양화진 땅에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다.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다. 16세가 되면서는 선교사의 연립주택을 지어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정들었던 박에스더라는 최초의 한국 여의사가 결핵으로 숨지게 되자 큰 쇼크를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그는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어려움은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생겼다. 일본정부는 셔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고 재판에서 징역 3년과 5000엔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결국 1940년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셔우드 홀 부부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쫓겨난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마지막 힘을 다해 선교에 힘을 쏟았다.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I’m still love Korea .....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 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스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혔다.
아펜젤러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신학교연맹 모임에서 만나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세계 선교의 꿈을 키워왔다. 그는 어느 날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접하고 자기의 삶을 조선민족을 위해 드리기로 결심하고 준비하다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도착하는 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소서.”
아펜젤러는 그의 기도대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다. 그는 초창기 조선 선교의 장을 열면서 교회사역과 학교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다. 그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의 복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