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흥행을 위해 제작된 것 같지는 않다. 흥행을 위한 할리우드 오락물의 개봉 시기는 하·동절기 휴가나 방학 시즌을 노리기 마련인데,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미국 영화의 흥행 공식인 '주인공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도 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필경 부활절을 겨냥하고 만든 영화로, 어떤 무게감 있는 교훈을 주기 위해 제작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 영화의 부제를 '정의의 시작'보다, '정의의 부활'이라 번역했어야 더 맞을 뻔했다. 다음과 같은 구조 속에서 이 영화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혼돈과 파괴
영화는 혼돈으로 시작한다. 그 이유는 슈퍼맨이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한다. 악에 대처하는 슈퍼맨의 선(善) 의지 자체가 매우 주관적이다.
심지어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관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사회를 도탄에 빠뜨리는 영웅'으로 인식되어 있을 정도다. 예를 들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의 권능을 남용하는 것이다. 그런 슈퍼맨의 태도를, 은퇴한 것으로 보이는 배트맨이 멀리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다.
2. 의에 관한 논쟁
그리하여 슈퍼맨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다. 배트맨이 다시금 장비를 착용하고 도시로 뛰어든다. 하지만 배트맨마저 자신의 주관적 의로 충천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배트맨이 구출해 주는 약자들은 자신들을 '악마'가 와서 구출해 준 줄 알고 있다. 배트맨이 약자를 구출하면서 악인에게 고문까지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접 징벌을 부과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배트맨은 자신의 그러한 의의 가치관을 걱정하는 노 집사(제레미 아이언스)에게 '우리가 언제 의로웠던 적이 있느냐?"는 놀라운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3. 하늘에서 온 사람과 땅에서 솟은 사람
고담 시(市)에서 흘러나오는 이러한 배트맨의 무자비한 악행(악에 대한 응징)에 대해, 평범한 기자 클락(슈퍼맨)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다. 언론을 통해 배트맨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대의 두 영웅 슈퍼맨과 배트맨은 이와 같이 주관적인 의(義)에 빠져 있어, 마치 사사기의 현장과 같아 보인다.
이들의 주관적 의를 부추기는 악인이 등장한다. 히스 레저(조커)의 연기력에 비하면 아직 한참 먼 꼬마 악당이지만, 그는 악에 관한 나름의 탄탄한 철학을 갖추고 있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강자가 아닐 것이며, 하나님이 강자라면 분명 선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악마가 언제나 하늘에서 내려오지 땅에서 올라온 적이 있더냐" 등은 단순히 흘려보낼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슈퍼맨은 하늘에서 내려온 정의이고 배트맨은 땅에서 솟은 정의이기 때문이다.
4. 빌라도의 관정
이 영화에서는 예수 당대 최고의 법정이었을 빌라도의 관정과도 같은 법정 하나가 나온다. 그 법정에 슈퍼맨이 마치 예수님처럼 선다. 그가 美 국회의사당 청문회에 출두한 것이다. 이 법정에는 빌라도를 대신해 하늘이 아닌 인류의 안위를 걱정하는 여성 의원이 주심을 맡는가 하면, 매수당한 거짓 증인이 등장한다.
이 법정에서 슈퍼맨은 세상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청난 누명을 뒤집어쓴다. 이젠 정말로 인간들이 슈퍼맨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조롱하고 욕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환멸을 느낀 그는, 자신을 일컬어 자기는 '하늘에서 온 자가 아니라 촌락의 농부였을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산으로 올라가 버린다. '(괜히) 아버지의 뜻대로만 살았다'는 것이다.
산에 올라 그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다. 아버지는 이 세상 분이 아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농부였던 아버지(케빈 코스트너)가 그 산에 묻혀 있다.
5. 악의 진멸과 롱기누스의 창
여전히 조커 흉내를 내는 이 악동이, 슈퍼맨의 고향 행성에서 온 물질을 활용해 슈퍼맨을 능가하는 악마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 괴물은 죽일 수가 없다. 지구상의 최고 무기로도 파괴할 수가 없다.
이 괴물이 탄생하고 있는 동안, 슈퍼맨은 '땅에서 솟은 인간' 배트맨에게 철저히 패배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 슈퍼맨이 죽음 직전에 숨을 헐떡이며 땅의 사람처럼 내뱉은 말 한 마디는 '마샤(다이안 레인)', 곧 '어머니'라는 단어였다.
그렇게 땅의 사람으로서 본질에 다가선 슈퍼맨은, 다시 힘을 내 괴물을 응징한다. 그런데 자기보다 훨씬 크고 힘센 그 악마를 응징하는 유일한 수단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창이었다. 크립톤 행성 물질로 된 그 창은 마치 롱기누스의 창인 것만 같다.
6. 죽음
영화에서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슈퍼맨의 장례식. 스코틀랜드 풍의 전통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장으로 치르는 듯 보이는 슈퍼맨의 장례식은, 마치 미국 자신의 장례식인 것만 같다.
영웅들을 불러 모아야겠다는 베트맨의 말에 대해, "슈퍼맨까지 죽은 마당에 이 세상은 워낙 타락해서 그 어떠한 영웅들을 불러내도 이제 가망이 없다"는 답은 미국 자신을 말하는 것 같다. 미국은 스스로 슈퍼맨이었을까?
이 영화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슈퍼맨의 앞선 버전들은 하늘을 나는 슈퍼맨의 속도감에 집중하는 영상 일색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면서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처음에는 인위적인 것 같아 영 아니다 싶었는데, 반복해서 보다 보니 이콘화(Icon)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이것이다.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의 드레스덴 궁정교회(Dresden Hofkirche) 제단화. |
감독 잭 스나이더는 이 이콘화를 알고 있었을까.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필자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하여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는 신학자다. 최근 저서로는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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