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세기의 대국'이 열렸다. AI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학습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인간과 기계의 대결이어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한판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거듭해서 패배하는 바람에 큰 충격에 빠졌다. 김성룡 9단은 "이제 인간이 인공지능을 한 판이라도 이기면 다행인 시대가 왔다"며 인간의 완패를 깨끗하게 시인했다.

똑똑한 알파고가 찜찜함을 넘어 이런저런 우려의 목소리를 만들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빠른 진화에, 앞으로 달라질 인류의 미래가 걱정스러운 게다. 이미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겨 눈물짓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제 전문인들의 자리까지 흔들리고 있으니 걱정이 앞선다.

대형 로펌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오늘 우리 변호사들의 최대 관심사는 이세돌의 패배였다. 다들 '이제 우린 어떡하냐'는 얘기만 했다." 변호사가 어떤 직업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좋은 판례, 유리한 판례를 찾는 게 급선무다. 그런데 사건 정보를 입력하면 적절한 판례를 찾아 주는 인공지능이 이미 개발되고 있으니, 변호사들의 일자리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사람들이 비단 변호사뿐이겠는가?  최근 휴대전화 기술은 나날이 발전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진화하는 휴대전화로 인한 편리함도 있지만, 그 폐해도 적잖음을. 누군가는 걱정한다. "인간의 편리한 소통을 위해 만든 휴대전화가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지 않았느냐?"

물론 "이건 휴대전화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반성을 촉구하지만, 돈이 목적인 기업의 상술을 멈추게 할 재간이 있겠는가? 과학과 기술 문명의 발전이 가져다 주는 앞날이 걱정스럽다.

며칠 전 뉴스에서 미국 사회에 만연한 분노방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누적되는 스트레스와 분노를 한번에 날리는 방법이 있다는 게다. 바로 분노방이다. 그 방 안에는 마네킹과 소파, 책상, TV 등이 놓여 있다. 그 방을 예약한 사람은 들어가서 야구방망이와 대형 망치를 들고 닥치는 대로 때리고 부순다. 화가 치미는 대로 발로 차고, 기구로 때린다.

물론 안전모를 착용하고 장갑을 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러다 도리어 다치면 어떡하지'하는 염려가 되었다. 그 방을 이용하는 비용은 5분에 25달러(약 4만 원), 10분에 40달러(약 5만 원), 25분에 75달러(약 9만 원)란다. 이런 분노방이 이제 미국을 넘어 다른 나라로 번져 나간다고 한다.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분노방이 심히 걱정된다. 우리 사회가 이제 '분노사회'를 넘어 '원한사회'로 치닫고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내재되는 스트레스와 분노를 저런 방식으로 풀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저런 폭발적인 표현 방식이 자칫 사람들을 향해 나타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운전하다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서로 치고 싸우는 모습을 보라. 정말 걱정스럽다.

스트레스와 분노를 거침없이 폭발해 내는 것보다, 스트레스를 승화시키고 분노의 감정을 다룰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 재간은 없다. 분노의 감정을 경험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축적되는 분노는 달라진다.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해서 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억압시키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폭발적으로 표출하지 않는 삶의 비법들도 개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쏟아부은 감정 에너지로 내면의 감정이 다 사라진다면 모르지만, 그게 습관화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된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삭이는 방법도 찾아봐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비결도 모색해야 한다. 어차피 스트레스와 분노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은 피할 재간이 없으니까.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울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었다.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살려 주었다. 그런데도 또다시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드니 얼마나 화가 치밀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스트레스와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스스로 삼키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순간순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갔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신의 처신 방법을 터득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역시 후처인 브닌나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분노가 쌓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남편을 찾아가서 퍼부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가 치밀어 오르는 스트레스와 분노를 해결한 방법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통곡하는 한나의 상한 마음을 만져서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기도 응답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한나의 스트레스와 분노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스트레스를 받는가? 가족과 주변 사람들 때문에 화가 치밀고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가? 요즘 여기저기서 허물어져가는 가족체계를 보면 염려된다. 가족 해체 현상은 비단 부부의 이혼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때 죽고 못 살아 결혼한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 갖고 법정을 찾아간다. 그로 인해 자녀들이 받을 상처는 어떤가?

어디 그뿐이던가?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고, 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하는 세상이다. 보험금을 노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세상, 잔소리 한다고 부모를 폭행하고 살해하는 세상,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부모를 패는 세상이다. 유산 때문에 자녀들이 부모 앞에서 꼴사납게 다투는 세상이다.

그래서 서서히 가족들이 해체되는 현상 속에 사회는 점점 병들어가고 있다. 사회의 가장 기초인 가정이 흔들리니 앞으로 우리 사회가 염려된다. 교회 역시 편치 않다. 이들을 돌아보는 목회 현장 역시 걱정이 한 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본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더냐?'(마 6:27) 그렇다. 우리가 걱정한다고 달라질 게 별로 없다. 어쩌면 쓸데없는 기우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적절한 염려와 걱정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일보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 내어 맡기는 믿음이 더 필요하다. 쓸데없는 염려로 영적인 질서가 깨어지게 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더 이상 염려에 머물지 말고 기도로 나아가야겠다. 내가 부족하니까, 나는 한계를 갖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하시면 안 될 것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