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나온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앞으로 한국에 개신교회는 하나의 교회, 즉 교파 구별 없이 단일한 교회를 설립한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단순히 꿈만 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위해 무던한 노력을 경주했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 총무 브라운(Arthur Brown)에게 한국에서 단일교회 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 보낸 일이 있다. “한국에서 ‘연합교회’(Union Church for Korea)는 본질적인 문제이며,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장로교인들은 하나의 교회 설립을 위해 모두 연합해야 한다.”
여러 선교회가 연합하여 구성한 개신교복음주의선교협의회가 계획한 일들이 많았다. 그 중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한국에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to have but one evangelical Church in Korea)였다. 이 협의회는 단일교회 구성을 위해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노력하던 중, 1904년에 하나의 결정을 했다. “때가 오면 한국에 하나의 개신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이 본 회의 결의다. 이 교회 이름은 ‘대한예수교회’다. 연합은 찬송가와 교회 신문 등을 출판하며, 가을에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이 모인다. 이 계획들 이후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그리고 복음사업은 계속돼야 한다.
이 연합 정신은 1905년 서울에서 모인 선교사 기도 모임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열정적으로 표했고, 동년 8월에 서울에서 모인 같은 모임에서도 ‘하나의 연합교회’(One Union Church)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 표출됐다.
1905년 이 일을 줄기차게 주도했던, “초교파주의의 열렬한 추종자” 언더우드는 그 목표에 대한 염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유능하고 잘 훈련된, [그리고] 철저하게 헌신적인 토착적인 목회, 분파적이 아니고 연합된 그리스도의 교회, 거기에는 감리교인도, 장로교인도, 성공회 교인도, 유대인도, 헬라인도, 스구디아인도, 자유자나 매인 자나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구별이 없고 다만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일 뿐인 교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한다. 나는 이 나라가 강하고 큰 팔로, 한편으로는 중국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그 세력을 펼쳐, 편견을 줄이고 상대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여 한국이 그 이웃들과 더불어 어린양을 영원히 찬양하며, 왕 중 왕이며 만주의 주님을 드높이는 기독교 국가의 거대한 원(圓)을 이루는 세 나라가 되는 것을 바라본다.”
같은 해에 언더우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들은 [장·감] 신앙 선언이 다르고, 예배 의식도 다르고, [예배] 방법이 다르고, 교회 정치도 다르지만, 그들의 진정한 목표와 목적은 하나인데, 그것은 “한국의 복음화”다. 한 믿음과 소망, 한 아버지, 한 구주, 한 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한 가지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에 따라 한 연합된 기독교회를 한국에 건설함으로 그들의 일치된 신앙을 보여 줄 때가 곧 올 것이다.“
개신교복음주의선교협의회가 해야 했던 일은 교육, 의료, 문서, 그리고 출판 업무가 다 포함돼 있었고, 이 일들을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업들도 결국은 하나의 교회 설립을 위한 전초 작업이었고, 최종 목표는 한국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1905년에 하나의 교회 구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런 단일교회 설립 의지에 대해 장·감 두 교회는 같은 해에 “한국 민족교회의 설립의 때가 차면, 그 이름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로 명명(命名) 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두 교회는 “열심히 바라고 기도하여 연합이 이루어져, 어린 한국 교회가 기독교권을 이끌어 주님께서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일교회의 설립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상호 작용한 때문이다. 그 중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선교사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의 비협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미국 남장로교회가 한국에서 연합교회 모색에 대한 얘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반문을 제기했다. “교회 연합을 제안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 기독교의 정체(政體)는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새 교회 신조는 무엇을 포함할 것이며, 이 나라 [미국]의 감리교와 장로교의 교리적 차이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리하여 미국 남장로교회는 한국에서 연합교회 문제는 후일에 논할 수 있으나 지금은 시기상조라는 견해를 밝혀, 한국 선교사들에게 공한을 띄웠다. 공한에, “후일에 여하히 타 교회와 연합하여 자유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가하나, 지금은 유안(留案)하는 것이 위호(爲好)”하다 기록했다.
1962년 남장로교회 선교사였던 조지 브라운(G.T.Brown)은 이 연합의 실패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 이유는 [선교사들] 모국 교회들의 비우호적 태도였다. 특히 감리교회는 한국에 와서 장로교회와는 달리 남·북 감리교회가 각각 교회를 설립하여 감리교회 자체 내에서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둘째 이유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연합에 대한 열의 부족이다. 여러 장로교회 선교부들이 독립노회의 조직으로 인해 연합에 대한 기선(機先)을 잃었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연합교회 문제를 논의했고, “이 문제는 1907년에 독립노회를 조직하고 나서” 생각해 볼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12년 장로교회가 총회를 구성한 후 협의회의 이름을 ‘General Council’에서 ‘Federal Council’로 바꾸었다. 또한 헌장에도 더 이상 교회연합(Church Union) 문제를 심각히 다루고 있지 않아, 결국 한국에서 단일교회 형성은 실패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의 애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원인으로 남인도교회나 중국교회가 성공한 단일교회 형성이 한국에서 실패한 것은 뼈에 사무치는 한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