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물리적 시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감각적 혹은 주관적 시간입니다. 물리적 시간은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으로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라면 제2의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감각적 시간은 시간의 물리적 흐름이 일정함에도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에 몰입하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만 몰입하지 않으면 시간은 천천히 흐릅니다. 흔히들 20대에 20킬로미터, 30대에는 30킬로미터, 40대에는 40킬로미터, 50대에는 50킬로미터 속도로 인생의 시간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나이 들수록 시간의 흐름이 점점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일정 기간의 시간이 전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살다가 사멸하고 마는 하루살이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사이에 물리적 시간의 차이는 엄청 크겠지만, 어쩌면 감각적 시간의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억측인가요? 하루살이가 해 지기 전에 냇가나 전등 아래 떼 지어 날아다니는 것은 구애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라 합니다. 아래위로 열심히 군무(群舞)하는 수컷들 속으로 암컷들이 날아들면 쌍쌍이 짝을 지어 허니문 비행을 합니다. 그리고 허니문 비행이 끝나면 하루살이는 물속에 알을 낳고 몇 시간 만에 죽음을 맞습니다.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다 사라지는 하루살이의 삶이 그저 덧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의 생애에 비하면 하루살이의 생이 보다 생동적이고 열정적이지 않은가요? 물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고귀함을 어찌 한갓 미물인 하루살이에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게으른 자를 향하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고 일갈했던 잠언서의 기자는 인간이 한갓 미물에게서도 배워야 할 지혜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고 귀합니다. 그들에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있어 귀합니다. 아니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귀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 하는 것보다는 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중죄를 짓고서 뉘우침의 시간 없이 감옥에서 한평생을 산 죄인보다는 절절한 사랑하며 반평생을 불꽃처럼 살다가 죽은 사람의 생이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대신 현재에 충실하며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시간을 최대한 선용(善用)하는 비결일 것입니다. 형형색색의 오늘이 모여 우리의 생애를 만들겠지만 냉철하게 따지고 보면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입니다. 내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렇다면 2016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올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묵직한 질문에 대한 답은 김기석 목사님의 글로 대신합니다.
이 생기 충만한 날,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들사람을 만나고 싶다. 스스로 자기 삶의 입법자가 되어 새로운 생의 문법을 만들어 가는 사람. 전사가 되어 낡은 가치를 사정없이 물어뜯고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기꺼이 끌어안는 성스러운 반역자들. 새로운 세상은 그들을 통해 도래한다.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이는 그 길을 일러 십자가의 길이라 했다.(김기석 목사의 산문집 《일상순례자》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에는 낡은 가치와 세상의 인습적인 지혜를 전복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만듭니다. 그러한 패러독스를 잃게 되면 기독교의 복음은 변질되고 그 정수를 잃게 되고 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역설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어떤 종교가 당대 최악의 고문도구였던 십자가와 같은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상징물을 내세운 적이 있던가요? 아니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물이 아닌 사건이었고 진리입니다.
“새에게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새는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앞으로 나아갑니다.” 십자가도 그러합니다. 십자가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에게는 힘에 부치고 버겁지만 이 땅에 생명의 싹을 틔우고 세상을 희망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것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2016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진 뚜벅이 인생으로 살아가면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치고 생명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한 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