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인심이 후했고,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산에 호랑이나 산적이 나타난다는 괴소문으로, 해가 지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시계가 귀하던 터라, 자칫 시간을 놓쳐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습니다. 오늘은 어느 집에서 잠을 자고 갈까 하고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면, 이를 먼저 목격한 아낙네들이 서로 자신의 집에서 묵고 가라는 통에 나그네는 어쩔 줄 모를 정도였습니다. 저희 집에서도 나그네를 초청하여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며, 밤이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았다가, 갑작스러운 방문객을 위해 달려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절하고 자신의 집에 유하여 쉬기를 간청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집에서 발을 씻기고 시원한 나무 아래 편히 쉬라고 권하며, 떡과 고기를 준비하여 정성으로 대접하였습니다.
창세기 19장에서는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방문객을 보고 일어나, 그들을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자신의 집으로 와 주기를 간청합니다.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했던 나그네들에게처럼 발을 씻기고, 편히 주무신 후 아침 일찍 갈 길을 가시라고 권합니다. 롯은 당시 정직하고 친절한, 소돔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등장하는 인물 중 나발은 마온 사람으로 갈멜이라는 곳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소유한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였던, 당시의 거부였습니다.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습니다. 갈멜은 마온과 십 황무지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근방 갈멜산이 아닌, 헤브론 남쪽 11.2km 지점이었습니다.
양을 지키는 사람들이 양털을 깎는 것은, 농민들이 추수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때 번영을 감사하고 기원하는 축제를 베푼다고 합니다.
모름지기 풍부한 재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값진 선물이기에 잘 사용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나발이라는 인물은 당시 사울 체제 하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 이름은 '벨리알의 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벨리알'은 사악하고 무가치한 존재이며, 구약에서는 배교 세력을 뜻했습니다.
당시 망명객이던 다윗은, 자기를 따르던 백성들을 후히 대접하리라 믿었던 나발의 행동이 심히 불쾌하여 그를 치러 가고 있었습니다. 나발의 재산과 생명을 밤낮으로 보호했던 다윗은 나발에 대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나발의 부인인 아비가일을 만나게 됩니다. 현숙하고 지혜가 충만한 아비가일은 생필품과 음식을 장만하여, 자신의 집으로 달려 오던 다윗을 만나 용서를 구합니다.
아비가일은 최선을 다해 다윗을 영접하고, 모든 지혜를 동원해 분노로 가득 찬 다윗을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열흘 후 나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재앙을 만나 죽게 됩니다. 아비가일은 후일 다윗의 둘째 부인이자 왕후가 되는 영광을 차지합니다.
예수님 당시 삭개오는 세상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대우를 받는 세리였습니다. 주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직접 만나고 싶은 열망이 있었지만, 키가 작아 많은 군중들 틈에서 쉽게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뽕나무 위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마침 주님께서 나무 아래로 지나시다가 삭개오를 보고 '속히 내려오라' 명령하십니다.
삭개오는 재빨리 내려와 '네 집에 유하겠다'는 주님의 반가운 음성을 듣고,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여 최선을 다해 모셨습니다. 이후에는 회개하여, 부정직하게 모았던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는 놀라운 사건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남의 물건을 착취한 것에 대해서는 4배나 갚겠다고 합니다. 이 감동적인 사건은 지금까지 성경에 기록돼 있어, 오늘날 믿는 자들에게 모범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우리나라 모두에 있는 후한 인심을 보면, 비슷한 민족적 정서와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후한 인심이 사라졌고, 극한 대립과 이기심만 남았습니다. 있어야 할 주님의 뜻은 어디론가 꼬리 내리고,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해 세상의 눈을 찌푸리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말이 어제오늘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 같으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말 자체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어려웠던 시대였지만, 그만큼 성직자들이 세상의 존경을 받았고, 감히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권위가 있었으며, 소외되고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천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요. 얼마나 세상에 미운 털이 박혔으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성직자들이 사명을 지키지 못한 채 교만과 욕망으로 눈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장로와 안수집사와 권사들 또한 세상에서 모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신자들보다 못하게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을 싫어하고, 가까이 친구로 사귀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명령인 복음화도 자동적으로 실패하는 것입니다.
교회 예산은 사례금을 비롯해 기본 물품과 관리비를 제외한 모든 헌금을, 불우 이웃과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그리고 복음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며, 목사님들은 마치 기업 회장처럼 군림하고 지역의 유지처럼 초청을 받아 식사 대접이나 받으며 때로는 정치인들과 함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심지어 교회 안의 어려운 이들에게조차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대접하는 데 갖은 수단을 다 사용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울하게 아파하는 성도들에게는 매몰차게 등을 돌리는 교회의 모습은 마치 사랑 없는 무덤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후한 인심'을 다시 회복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져 더불어 살아가는 분위기를 회복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초대교회의 신앙을 본받자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 초대교회처럼 물건을 서로 나누면서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통용하면 어떨까요. 정말 초대교회 신앙을 계승하여 베푸는 삶을 나부터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복음은 저절로 전파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