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의 결과 중 마지막은 네째는 에큐메니컬 정신의 구현이다. 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형제 의식이 굳어지게 됐다. 그 동안 선교사들은 그들이 한국 교회에 복음을 가치고 신앙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자연히 우월의식을 갖고, 언제나 위에서 가르치는 소위 갑(甲)의 태도를 취했다. 반면 배우는 한국 사람 입장은 항상 낮은 데 위치하는 을(乙)의 등식이 은연중에 설정돼 있었다. 이런 구도 속에 이 두 그룹 간,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을 통과하면서, 선교사들도 자신들이 죄인임을 확인했고 자신들도 언제나 선생이나 거룩한 자들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존재들임을 자각했다.
선교사들이 이제 한국 교인을 자기들과 동등한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됐다. 한국 교회 지도자나 교인에게 더 이상 선교사들은 선생으로 남아 있지 않고 같은 동료 형제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부흥운동이 남긴 값진 결과다. 이것은 특히 그 해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일곱 사람의 첫 졸업생이 나오고 목사안수를 받음으로 이제는 한국 사람도 목사로 당당히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게 됐다. 평신도 선교사들과 선교사 가족들이 한국인 목사를 선생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도래된 데도 그 원인이 있다. 이로써 부흥운동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갈 3:28)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부흥운동의 에큐메니컬 정신은 교파를 초월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사경회가 장·감 연합으로 모였고, 두 교회는 서로 강단을 교류했다. 특히 길선주 목사는 여러 감리교회에 다니며 사경회를 인도했고, 감리교회 목사들도 장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초교파적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그 동안 눈에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그어졌던 교파간의 간격과 갈등을 해소하는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
이상에서 부흥운동의 몇 가지 긍정적 결과를 검토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부정적 면에 대해 논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들 주장은, 이 부흥운동이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非政治化)시켰고, 몰역사화(沒歷史化)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즉 선교사들은 1905년 을사늑약이 선포되고 한국이 점점 일제의 식민지화되면서 이에 격분한 일반 백성들과 교인들 사이에 반일적 태도가 구체화되고 무력항쟁의 소지가 높아간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영적 면에만 치중하게 하여 예수 믿고 천당에 가는 일에만 몰두하게 만들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교인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들, 특히 정치적인 면에는 일체 간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 부흥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흥운동이 끝난 후부터 한국 교회의 항일정신이 희미해졌고 교인들은 내적 신앙에만 치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부흥운동의 본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곡해라 볼 수밖에 없다. 부흥운동, 즉 성령운동이 선교사 몇 사람이 모여 성령운동을 일으키자고 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님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 자신에 의해 주도된다는 사실은 성령론 첫 장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던가?
또한 비정치화 문제도 ‘교회와 국가’의 문제라는 커다란 명제에서 보아도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위해 기독교 역사 속에 얼마나 처절한 투쟁을 벌였는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나온 생각이다. 예컨대 1789년 미국의 헌법에서도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명문화했다는 것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 “교회는 반드시 비정치화 되어야만 한다.” 교회는 정치화할 수 없는 집단이다. 교회가 정치 집단화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수행하는 곳이 돼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다고 교회가 사회의 온갖 부조리나 구조적 악이나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성경이나 읽고 기도만 하고 예배만 드리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국가가 비복음적 일을 자행할 때는 당연히 교회가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해야 하고, 또 사회의 부조리 척결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점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가 정치문제를 직접 교회의 모든 조직을 통해 대응해 나간다면 교회는 정치 집단이지 하나님의 교회일 수 없다. 교인 개인은 얼마든지 정치 집단을 만들 수 있고 정치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정치화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부흥운동이 한국 교회를 몰역사화, 비민족화했다는 평가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비록 무력항쟁에 앞장서지 않았지만 참 그리스도인은 민족의 고난이나 국가 독립 상실에 결코 무관심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민족이 고난에 처했을 때 항상 기독교인이 앞장선 사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부흥운동 후 교회가 비정치화, 몰민족적 모습을 보임으로 적지 않은 민족 지도자급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하는 시각이 있다면 이것도 부흥운동에 대한 단견에 불과하다. 민족 지도자들이 교회를 떠난 것이 교회가 비정치화한 데 기인했다면, 그 지도자들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평가 할 수밖에 없다.
1907년 부흥운동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섭리하시고 역사하신 성령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는 비로소 민족교회로 틀을 잡게 됐다. 여기서 얻은 영력으로 앞으로 겪어야할 수난의 가시밭길을 헤쳐 나갈 힘을 비축했다. 한마디로 1907년 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되게 한 결정적 사건이라 단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1907년 대부흥 없는 한국교회는 없다고 말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