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Photo : 기독일보) 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환경은 삶에 많은 영향력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이러한 삶 가운데서 인간은 "사느냐 와 죽느냐" 그리고 "행복과 절망"  과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삶의 상황 가운데 인간이 피부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아내가 아는 지인으로부터 아보카드 나무 한 그루를 선물로 받아 집에 가져 온 일이 있었다. 아내는 아보카드 나무를 다른 화분에 옮겨 심고서 그것을 부엌 카운터에 놓았다. 그런데 며칠 동안 아보카드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매일 같이 나무의 줄기 윗 부분 부터 시들해지더니 그것이 점점 아래로 내려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것을 선물해 주신 분께서 처음에 아보카드 나무를 어디에서 키웠는지에 관해 물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 아보카드 나무는 처음부터 밖에서 씨가 심겨 진 것이고 계속해서 밖에서 자란 것이었다. 시들어진 아보카드 나무의 이유를 보면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화분에 흙이 말라서 나무가 죽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전에 자라던 흙의 토양과 맞지 아니하여 몸살이를 하다가 힘들면 시들어지게 된다. 이 두가지를 놓고 볼때 우리집의 아보카드가 시들어간 이유는 두번째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아내와 결정한 것이 그 나무를  밖 현관에 내어 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며칠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서서히 본래 싱싱했던 나뭇잎들이 살아나는 것이 었다. 그것을 보고서 느낀 것이 있었는데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자연이 살게 한다는 사실이다.  자연에서 주어지는 해, 바람 그리고 이슬은 사람이 가꾸는 것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신비를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 볼때 식물이 가장 잘 자라는 환경은 사람의 집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그것들이 자연속에서 있을 때 에는 키가 자라고 강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실내의 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나무들은 잘 적응하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을 자주 본다. 그래서 식물들은 자연이 주는 이슬과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야 오래 살 수 있다. 즉 식물들이 주어진 자연 환경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갈 때 병들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뽑내며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아갈 안전한 곳이 이 세상에 있을까? 그리고 세상에서 영적인 기쁨을 누리며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은 정말 가능한 것인가? 필자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대답을 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하고 평안함 그리고 안전하게 살아갈 곳은 이 땅에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창조되어진 인간은 마음에 평안을 느끼며 행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거한 삶을 살아야만 이 세상 어느 곳에 살든지 영적인 기쁨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가야 만이 영생의 기쁨을 가지고 날마다 감사함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붙잡기 보다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것만 붙잡을 뿐 아니라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추구하다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성경은 말하기를 인간이 계획할지라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 라고 말한다. 그런 하나님을 인간은 어떻게 해도 당할 수 없다. 잠언21:30절에 말하기를 "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인간이 교만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을 알려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온 세상에 알리시기 위해 보통사람들 그리고 고기잡이들을 제자로 삼으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은 삼년 동안 제자들에게 복음이 무엇이고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형성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가르쳤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기 흩어져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어부로 생활을 했던 일들을 다시하기 위해 디베랴 호수에 가서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때 거기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7명이었다. 그들은 베드로, 도마, 나다니엘, 야고보, 요한 그리고 다른 두명의 제자들이었다. 밤새도록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기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때 잡은 큰 물고기가 백 쉰세 마리었다. 그런 과정속에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의 모습들은 세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예수님이 사랑하던 요한이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 본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시몬 베드로에게 우리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 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두번째 요한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너무나 기뻐 그물을 잡던 것을 놓고 즉시 바다로 뛰어 들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명의 제자들은 요한이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잡고 있던 그물을 놓치 않은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절망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였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고기잡이를 디베랴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말씀하셨을 때에 그들이 반응한 것은 각기 달랐다. 이것은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면서 한 해 동안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일까? 생각해 보았다. 때로는 베드로와 같기도 하고 요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나는 다섯명의 제자들 처럼 예수님을 눈으로도 보고 들었지만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 커서 그것을 붙잡고 살아온 거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보잘 것 없은 사람인가? 라는 생각에 하나님께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민의 삶을 살면서 목회를 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주 해보지만 현실의 벽이 너무나 크게 느껴져 때로는 그것을 쉽게 놓치 못하고 마냥 붙잡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모습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사항이다. 때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돈, 명예와 권력의 그물이 너무 무거워 잡고 있는 것을 쉽게 내려 놓지 못하기에 주님이 주신 소명의식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그물이 너무나 무거워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그물은 생명이 없기에 항상 무겁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주님의 자녀들이 살아갈 영생의 길은 생명이 없은 무거운 그물을 붙잡고 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거운 그물을 놓고 주님을 따라 갈때 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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