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화와 함께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한반도 전역에는 교회와 기독교 학교들 뿐 아니라 신문이나 간행물 등 문화 매체들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한편으로 한반도를 향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의 야욕이 가시화되어 가는 시기였다. 일본은 조선의 모든 분야에서 지배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군사 및 외교적으로 조선을 완전히 장악해 갔으며, 1905년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통해 정치권을 수탈했다. 경제적으로도 일본은 1907년 국유미간지이용법을 제정하여 우리 국토에 대한 야욕을 달성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은 1910년에 일본에 의해 결국 병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된다.
이 암울하고 위태로운 국내의 정세 속에서 조선의 교회도 내일에 대한 소망을 잃고 쇠퇴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큰 시련 속에서 오히려 회개와 갱신의 신앙운동을 준비하는 동기를 부여받게 되었다. 즉 민족의 위기, 국모 시해(國母 弑害), 청일전쟁, 고종의 퇴위(退位)와 같은 연이은 슬픔과 두려움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오직 소망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통회 자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크나큰 반전이 가능하게 된 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운동의 역사였고, 마침내 한국교회는 대부흥운동의 시기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조선에 내한(來韓)한 선교사들이 초기에 나름대로 사역의 만족을 누릴 수 있었던 근거가 있었다면, 그것은 한반도 내에서 교인 수와 교회당들이 급증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가면서 선교사들의 마음속에 깊은 회의와 질문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과연 한반도에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에 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19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회개의 역사가 무엇인지, 거듭남의 은총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성령세례의 능력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체험적인 간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눈으로 조선의 교인들을 볼 때, 조선 사람들이 교회를 가까이하는 이유는 이런 영적 체험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에 근거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선교회의 진정한 복음적 회개와 갱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필요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 기도회를 열게 되었고, 마침내 성령께서는 이 기도회를 통해 먼저 선교사들 내면의 죄악을 회개하게끔 하시고, 새로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곧 조선교회 속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은 성령의 회개와 거듭남,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히 세례 주시는 능력의 체험으로 나타났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가 오순절적 성령의 능력 체험이었다는 점은, 우선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오기 전 경험했던 성령의 능력이 어떤 성격이었는가를 알게 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선교사들이 강하게 체험했던 것은 19세기 후반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한 성령세례의 능력이었다. 당시 부흥운동 속에 나타난 성령론의 성격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과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으로 크게 분류된다.
이 두 성령운동은 19세기 후반 영미 부흥운동의 두 축이었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개혁파 전통에, 그리고 후자는 웨슬리안주의에 근거를 둔 운동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시작된 현대 오순절주의는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이나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보다 비교적 늦은 1920년대 이후이다. 그러므로 1910년 이전 대부흥운동 당시에는 아직 직접적인 오순절주의의 영향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첫 번째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에 있다. 오벌린 완전주의(Oberlin Perfectionism)가 너무 인간적 차원에 맞춘 것에 불만을 가진 Higher Life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령론이라든가, Keswick에서 시작된 성결운동이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 것 역시 그렇다. A. J. Gordon이나 A. B. Simpson의 강조점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두 번째 핵심으로, Asa Mahan이나 D. L. Moody, 그리고 R. A. Torrey에게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는 "중생한 자가 위로부터 받는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 관념을 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 이 두 가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핵심은 내한(來韓) 선교사들을 통하여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후반 영미 부흥운동에 나타난 성령론의 두 번째 조류는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이다. 전쟁 전 웨슬리안 완전주의(Wesleyan Perfectionism)의 지도자였던 Phoebe Palmer를 역시 이 새로운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선구자로 본다. 그녀의 책 The Promise of the Father는 특히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가 많이 나타나서 당시의 성령운동에 끼친 영향이 크다. 그녀는 성령세례를 '감리교의 특징적인 교리'라고 불렀으며, 오순절적 패러다임의 입장에서, 정결케 하는 사역과 함께 봉사의 능력을 부여하는 사역을 함께 강조하게 되었다. 그녀는 "성결은 곧 능력"이라고 했으며, "정화와 능력은 동일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A. M. Hills는 오순절 체험을 "성결과 능력"이라고 했으며, H. C. Morrison 같은 이는 "성령세례는 신자의 영혼을 정결케 하며 또한 그들에게 봉사의 능력을 준다"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