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대해 논하자니 너무 거창한 거 아닌가 하는 부담감이 들었다. 하지만 가을인데 뭐 어떠랴 싶다. 한번쯤 무거운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해도 좋을 사색의 계절, 가을 아닌가.
“인생사용설명서”를 쓴 김홍신은 단 한번뿐인 삶을 위해 우리는 필요한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우리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는지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보다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도 젊은이들을 향해 ‘무엇이 될까보다 어떻게 살까를 꿈꾸라’고 충고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몇 년 전에 나는 이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아주 단순명쾌한 답을 듣게 됐다. 어느 찜질방에서 땀을 내고 있을 때였다.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보이는 몇몇 중년 여성들이 옆에서 속닥거리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느 중견 남자 탤런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호랑이 선생님이 죽었데!” “그러게 말이야. 참 안됐어.” “술을 많이 먹고 스트레스가 많았데나 봐.” “인생이 참 허무하지? 아무튼 하루하루 잘 살아야 돼.”
답은 그거였다. ‘잘 살아야 한다.’ 이것을 어떤 이는 “인생은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모세는 기도했다. 그렇다. 인생은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요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삶을 잘 살아가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의식일 것이다. ‘무엇을’ 하며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의 문제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기 삶에서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더 행복하다고 한다. 크든 작든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이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산다는 것도 밝혀졌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까. 성경의 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이나 직업과는 상관이 없다. 주님의 부르심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모든 일을 그런 목적의식으로 하고 있을까? 영국의 어느 큰 건축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던 인부 한 사람에게 지나가던 한 성직자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인부는 자기 직업이 석공이고 지금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돌을 다듬고 있다고 대답했다. 똑같은 질문을 다른 석공에게 했더니 그의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일이라도 목적의식에 따라 이처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교회음악의 대가인 바하는 자신의 작품에 ‘SDG’라는 약자를 써놓곤 했다. 그 글자는 ‘Soli Deo Gloria’라는 말의 첫 글자들이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뜻이다. 그는 음악이 직업이었지만 그것을 단순히 생계유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분이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어느 율법사의 질문에 답하실 때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한다면 이웃을 위하여 사는 것이 필수요건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투적 무신론자’로 알려진 동물행동학자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말했다. 성공한 유전자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고. 그에 대해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는 “이타적 유전자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남의 아픔을 느낄 때 인간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했다. 실로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 이상의 존재다. 그 속에 영이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인격체다. ‘이기적 유전자’를 통제할 수 있는 이성과 믿음을 가진 존재이고 그 힘을 올바로 발휘하며 사는 것이 ‘인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원리는 오묘하다. 우리가 남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자 노력할 때 결국 가장 큰 행복을 얻는 것은 우리 자신이니까 말이다. 5인분을 먹는 것보다 다섯 명을 먹이는 것이 더 행복한 법이다. 실제로 조사해 본 결과, 행복한 사람은 삶에서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스튜어트 에머리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열정 포트폴리오”를 집필하기 위해 지속적인 성공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가 발견한 사실은 행복한 사람들의 목표가 명예나 부, 또는 권력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삶의 목표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공허감과 불행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배워서 남 주나?’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남에게 주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세르비야에서 국민 오페라 가수 대접을 받는 우리나라 성악가 이헌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간절한 꿈은 오페라 출연 1회당 만 불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힘과 행복을 주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그 꿈을 실천하면서 그는 아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우리도 그런 아름다운 목적을 위해 배우고 일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 가을에 우리의 인생을 생각해 보자.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를.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헌신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삶은 보람 있고 행복한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해야 한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이 가을에 우리 모두에게 풍성히 임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