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크릭사이드 교회 리더목사와 반스 앤 노블(Barnes & Noble)에서 커피를 마시며 교회의 성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적이 얼마전에 있었다.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가장 핵심이 된 것은 교회 안에 질적,양적인 성장을 어떻게 이루며 그것에서 어떻게 자유함을 가지고 사역을 감당하느냐 이었다. 그 중에 목사에게 가장 민감한 것은 수(數)에 대한 의식이다. 이것은 한 주에 교인이 몇명 출석을 했느냐에 대한 관심이다. 목사가 교회 안에서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것은 주일날 교회에 참석한 교인의 수가 얼마인가?이다. 이러한 수에 대해 민감한 것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교회를 리더해 나가는 목사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
수개월 전에 교회 리더목사가 교회 안에 사역을 감당하는 협력목사들에게 자신의 목회 방향을 나눈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의 개념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맡기며 주님의 뜻대로 사역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리더목사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 중에 수에 대한 관심을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에 대해 마음속에 있는 진심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역을 감당하는 미국교회 리더목사가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김 목사님! 한인교회를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 "한인사회 공동체안에 어떻게 접근하여 복음을 제시할 것인가?" , "예배를 위해 기타를 치면서 찬양 인도를 결정한 계기가 무엇인가?", "목사 한 사람이 찬양인도, 예배인도, 설교...등 수 많은 것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이러한 질문을 받고 필자는 두가지로 답변을 했다. 첫째는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그리고 두번째는 "이제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교회성장을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의 토대는 요한복음 5:30절로 예수님께서 의심의 눈초리로 주님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이 누구인지를 증언하는 말씀이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이 말씀을 리더목사가 알고 있지만 필자가 말한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을 기다리지 않겠다."것을 듣고는 너무나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이 필자의 눈에 여실히 보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는 않했지만 내가 그분이라면 "당신 목회 그만 하려고 하는거야?"라는 마음 한 가운데 질문을 물었을 것이라고 본다.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리더목사 에게 필자는 왜 내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것은 시애틀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한 동안 설교를 하는 중에 오직 관심은 누군가 교회의 문을 열고 예배당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란적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예배를 드리러 교회 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 너무나 감사하여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낸 것처럼 여겼다.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분이 교회봉사를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수 많은 이유로 인해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데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상처를 받고, 떠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목사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 상처를 갖게 된다. 그 상처가 깊어지면 목회를 하는 것이 싫어지고 때로는 사역이 실패로 여겨지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작은 교회 사역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봉사하는 사람의 부재로 인해 교회안에 프로그램을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예배를 위한 찬양을 담당하는 사람이 없기에 때로는 음악이 없은 아카펠라로 찬양을 해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이 주어지는 경우는 목사나 사모가 악기를 다룰 수 없을 때이다. 악기를 다룰 수 없는 목사 부부의 간절한 소망은 악기를 다룰 수 있는 누군가에게 접근해야 하고 아는 지인들에게 찾아가 수 없이 부탁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작은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운 점이다.
이와 반대로 큰 교회들은 예배에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넘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은사를 사용하지 아니함에도 작은 교회에 가서 봉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수년을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던 필자에게 어느날 하나님이 이렇게 질문을 하셨다. "더 이상 음악을 하는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지 마라", " 사람이 없으면 네가 음악을 배워서 예배를 인도하라"이러한 말씀으로 도전을 제시하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을 했다. " 예 하나님이 원하시면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제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나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하겠습니다."
이에 순응을 한 필자는 사모에게 제안을 했다. "이제 당신은 드럼을 배우고 나는 기타를 배워서 찬양을 인도합시다." 그 소리를 들은 아내는 너무나 반가워 그러자고 했다. 그 후 한달이 못되어 아내와 나는 교회 안에서 찬양을 인도하게 되었다. 수년을 기다려온 나는 하나님의 의도를 지난 수년 동안 모른 것이다. 이것을 볼때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이와 더불어 필자는 교회성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만 하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올바른 것이 아닌지 앎에도 그들에게 의롭고 온전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제시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죄와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지 아니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으며, 작은 교회에서 한 사람이 중요하기에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에게 비위를 맞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려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 것은 교회안에 하나님 보다는 사람이 더 필요한 것이며, 그들을 기쁘게하여 교회에 오게 하려고 구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10년이 넘게 작은 교회를 사역해 오면서 한 가지 확신을 가진 것은 '사람을 기다리기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이러한 모습으로 작은 교회들이 변화하려고 한다면 사람으로 인한 실망감에서 자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극 소수의 사람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더 기뻐하실 것이다.
크릭사이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 교회웹:thecreeksidechurch.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