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라는 교회 성도들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큰 딸아이의 결혼식 리허설의 신부 입장 순서에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 때문에 리허설에 참여한 다른 식구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한 번도 흘려보지 않은 눈물이었다.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슬퍼서 흘린 것도 아니고, 섭섭해서 흘린 것도 아니었다. 그 눈물에는 딸을 생각하며 기쁨, 아쉬움, 감사, 그리고 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함께 섞여 있었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눈물 주머니가 터져서 갑자기 바보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목회를 하면서 주례를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는데 왜 이리도 다른 감정일까? 나 스스로도 의아했다. 그 다음날 결혼식 때에는 많은 사람을 의식해서 눈물을 꾹 참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 대신 아내의 눈물 주머니가 터져서 좋은 날 좋은 감정을 그렇게 표현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지난날 주례자로 인도했던 수많은 결혼식을 생각해 보았다. 결혼식을 하기 전날 늘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리허설을 했는데, 나는 주례자로서 열심히 순서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2-3번 연습을 시켰다. 특별히 신부와 아버지가 들어올 때면 영락없이 준비된 음악과 발 박자가 맞지를 않아서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내일 결혼식을 하겠느냐”고 웃으며 다시 연습을 시켰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내가 직접 신부의 아버지가 되어보니 발 박자가 안 맞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주례를 했던 결혼식에 늘 신부와 아버지가 있었고 다른 부모가 있었지만, 한 번도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어떠한 감정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한 번 겪어보니 앞으로 있을 결혼 주례는 이전에 했던 주례와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결혼식에 가는 나에게 웃으면서 “절대로 울지 말라”고 당부한, 얼마 전 자신의 딸을 결혼시킨 집사님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내가 겪어 보아야 아는 것임을 깨닫는다.
시편의 시인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편 139장 1-4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나의 고통과 절망 가운데에 눈물도 아신다. 하나님께서 겪어 보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위로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 인자하심에 늘 안겨 있다는 것을 믿고, 위로 받을 수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살아갈 때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임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심에 평안을 찾고 감사를 드린다. 우리의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시다.
앞으로 결혼 리허설 때에 신부 입장을 연습하는 아버지들에게 발 박자가 맞지 않아도 웃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