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멍청이! 편집장이 매일 부하 직원들에게 하는 말이다. 경멸하듯 사람의 위아래를 훑어 보며 눈빛은 누가 봐도 ‘형편없군!’이라 말한다. 폭풍우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상황이라도 비서는 보스의 교통편을 반드시 찾아야 내야 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편집장 프리슬리의 모습이다.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대표적 사례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소위 ‘나르시시스트’는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탁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자신의 거대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통제한다. 특별대우를 원하며 무대 중심에서 조명을 받으며 찬사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자기의 ‘완벽함’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누구도 가차 없이 적이 된다.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의 감정이나 욕구를 공감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말 그대로 장애다. 주변 사람들을 끔찍하게 괴롭히는 괴물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괴상한 성격 장애인으로 불리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흥미롭게도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나르시시즘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하셨다. 사람은 신처럼 다스리고 싶어한다. 섬김받는 것을 섬기는 것보다 선호하며 꼬리보다는 머리가 되길 원하고 주변인보다는 중심인물이 되길 원한다. 조연보다는 주연을 원하고 2위보다는 1위다. 지난 월드컵 결승전에서 패한 메시의 표정이 시상식 내내 어두웠다. 월드컵 대회에서 2위도 1위 못지않게 대단히 훌륭하지만, 챔피언이 되지 못한 그에게 2위도 매우 훌륭하다는 말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을 것이다.
상담학자 로버트 맥기는 그의 책 ‘내 안의 위대한 나’에서 사람은 타인의 평가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내 존재 가치가 타인의 평가에 달려있다고 믿는 것이다. 한편,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무조건 사랑받을 존재다’라고 생각하는 절대적 자존감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자존감의 기준을 타인의 평가에 두는 대신 신에게 둔다. 신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의 자존감은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다. 절대적 자존감에 대한 확신 덕분에 심지어 타인의 상승까지 즐겁게 응원할 수 있다.
상대적 자존감을 추구하는 ‘나만 주인공’은 타인을 조작하기 쉽다. 오래전 유대 사회의 주류였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만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그들 마음에 이방인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려움을 느끼게 한 예수님을 끝내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했다. ‘나만 주인공’은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사회적 상승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반면 ‘나도 주인공’은 타인과 하모니를 이룬다. 내가 중요한 만큼 주위 사람들도 모두 VIP다. 자존감의 기준을 신에 두었기 때문이다. 자기와 타인들 모두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연극 무대가 있다면 어떨까? 신비로운 일이다. 이런 사건이 우리 삶의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져야 한다. 너와 나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신비로운 만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사랑의 확증이라는 사실이 믿어져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가진 자기애적 장애는 하나님의 이 완전한 처방으로만 치료될 수 있다. 역시 예수님 안에 치료 약이 있었다. ks@mbts.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