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청소년들은 예수님을 불편한 존재로 여기기에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면 한 세대를 잃어버릴 수 있다 생각한다. 십대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또 청소년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그리고 여러 기독교 학교의 설문 조사 자료를 근거로 해서 왜 청소년들이 예수를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 자체를) 불편하게 인식하는지 시리즈로 살펴 보고자 한다. 첫 호에서 제기한 바, 청소년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10가지 이유에 대해 각각 해답을 제시해 가려 한다.
9.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면 왜 이렇게 많은 아픔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이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라 하겠다. 요즘 청소년은 자신 개인의 삶과 주변의 아픔은 물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통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크고 작은 사건, 전염병, 기근, 대지진, 집단 사살, 테러 등을 수시로 접하고 있다. 우선 이런 소식을 자주 접하는 청소년은 둔감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좋고 선한 분이라면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아픔을 허락하는가”란 질문을 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아이들이 좀 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며 성숙해졌기에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여겨야겠다. 그러니, 청소년들의 질문 자체엔 문제가 없으며,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사실 이런 맥락의 질문은 대철학가들이 고민하고 씨름했던 문제다. 인생의 고통, 그리고 더 큰 차원에서 볼 때 선과 악의 관계를 다루지 않은 철학가가 없을 정도로 아픔과 고통, 그리고 슬픔이야말로 영원한 인간의 숙제이다.
예를 들어, 선교사나 전임 사역자 자녀의 경우, 부모가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를 섬기지만 가난, 거부, 소외 등의 이슈를 접하는 것을 본다. 일반인도 사랑하는 식구나 친지의 건강 문제, 병, 아픔, 그리고 죽음을 체험한다.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도 왕따, 빈정거림, 거부, 상처를 당한다. 그러니, 교회에서 듣고 배워온 선하고 좋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나와 다른 기독교인이 겪는 아픔에 왜 그냥 침묵하고 계신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질문과 질문자를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면 안 된다. 이런 질문과 고민을 갖고 있는 청소년과 아이들에겐 정말 지혜와 사랑을 겸한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고, 힘들고 어려울 때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줘야겠다.
다시 문제의 중심으로 돌아가자. 이 세상에 고통이란 문제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통이 없다고 부인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떤 종교는 고통이란 마음 자세의 문제이기에, 고통을 부인하고 살아가다 보면 점차 아무 것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 무신론자들은 고통의 존재 그 자체가 신의 존재, 특히 기독교 삼위일체 사랑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고통이란 죄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라고 믿는 사람도 많다. 욥의 친구들이 바로 그런 인과응보적 답을 욥에게 제시하지 않았나?
철학자들도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토마스 합스는 인생이란 정말 “더럽게 힘들고 어렵고 짧은 것”이라 표현했고, 볼테어는 믿음으로 고통을 이겨보려는 사람은 소박하고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이라 했고, 칸트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 고통과 아픔이 따른다 주장했고, 쇼펜하워는 삶의 고통이 너무 심하기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기독교 변증학자 C.S. 루이스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Problem of Pain(고통의 문제)란 책을 통해 성경적으로 고통의 정의를 내리고 올바로 보는 관점을 제시했다. 오늘 루이스가 다룬 내용을 정리해 우리 청소년과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보겠다.
루이스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다. 그 후 아버지와 정서적으로 단절된 관계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청년 시절엔 전쟁의 무자비함을 체험했고, 성인이 되어 옥스포드 대학에서는 동료 교수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리고, 장년기엔 사랑하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40년 42살의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회고록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전엔 “악의 문제”를 다루며 무신론적 주장을 고집했던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며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고 나중에 언급했다.
“고통의 문제”의 핵심적 질문은 “어떻게 사랑이고,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이 고통과 아픔과 공존하는가”였다. 좀 더 구제적으로 말하면 “선하신 하나님이 왜 고통과 아픔을 허락하시는가?”라 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다루며 루이스는 인간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모든 피조물이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원하시는 대로 다 하실 수 있다. 셋째,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행복을 누리고 있지 않다. 넷째, 그렇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선하지 않은 분이시던지, 전능하지 않으시던지, 아니면 선하지도 않고 동시에 전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인간의 생각, 즉 인간 중심적 생각을 깊이 다루며 루이스는 언어의 한계, 즉 단어와 표현의 한도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선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조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뜻인가? 하나님이 선하시면 인간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셔야 한단 말인가? 사랑이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랑한다면 무조건 상대방의 원하는 바를 다 들어주는가? 행복이란 또 무엇인가? 진정한 행복은 기쁨과 즐거움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가? 고통이 없다면 진정한 행복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 인간이 자아중심적 관점으로 보면 고통과 아픔이 존재하지 않아야만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그렇지 않음을 루이스는 깨달았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분에겐 불가능이란 없다(눅 1:37). 그런데,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non-sense 즉, 무의미한, 말도 안 되는 행위를 안 하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고 동시에 그 자유를 주지 않으실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든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지만 동시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인간도 할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며 동시에 자신의 선택을 창조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선택의 자유를 행사해서 악을 택했다 하자. 그는 이 선택을 창조주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왜? 당연히 결정권을 행사한 자가 당사자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런 논리를 통해 만약 고통과 아픔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그저 창조주의 꼭두각시 내지 로봇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최대의 선물인 자유를 주셨다. 인간은 그 자유를 기반으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이 관점으로 본다면 고통과 아픔도 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의 부분인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선함과 희락과 사랑의 진미를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또 전능하시다. 우리의 삶엔 고통과 아픔이 존재하는데, 그 자체가 성경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한다. 사실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데, 복음성가의 한 구절같이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 즉, 이사야 53:3 말씀 같이 “질고를 아는 분 (Man of sorrow)”이시다. 다시 말해, 고통과 아픔 가운데서도 소망이 되시는 분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이다.
고통과 아픔을 두려워하기에 피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 세대의 청소년들에게 이런 논리가 쉽게 먹혀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이고 진리이기에 인내와 사랑과 열정으로 가르쳐야 한다. 부모는 삶의 성공과 행복은 물론, 아픔과 고통,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세를 자녀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은 하나님을 요술 병 속 마법사로 여기지 않고,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아갈 것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