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남자는 여자 한 사람 잘 만나면 출셋길이 열린다. 물론 여자 팔자도 두레박 팔자라니까 남자 한 사람 잘 만나면 장래가 풀릴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만남 중 부부의 만남이 제일 중요한 것이며, 따라서 함부로 결정하면 안 되는 것이다. 막살던 난봉꾼 남자를 정승까지 만든 일타홍(一朶紅)도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다.
조선 선조 때 충청도 금산(錦山)에서 태어난 일타홍이 어떤 연유였던지 "한 떨기 꽃"이라는 기명(妓名)으로 기적(妓籍)에 오르고, 10대 후반부터 한양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또 다른 남자 심희수는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沈連源)의 동생 심봉원(沈逢源)의 손자로 누가 봐도 나무랄 데 없는 명문대가의 후손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방탕한 소년이 되었다.
하루는 어느 권세 있는 재상 집안에 잔치가 열렸는데, 심희수는 그 집에서 음식과 술을 마구 먹고 마셔댔다. 사람들이 끌어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때 그 잔치에 초청되어 춤을 추던 기생 일타홍이 그에게 가만히 다가와 설득한 후, 그와 함께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소실로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심희수의 어머니는 집안이 가난하여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타일렀지만, 일타홍은 심희수의 기상이 범상치 않으니 자기가 한번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허락을 받은 일타홍은 그날부터 기생을 그만두고 심희수의 서당 공부를 도왔다.
심희수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이모부인 노수신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노수신의 동생의 딸과 정식 결혼을 했다. 일타홍이 주선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소실로 만족했다. 심희수가 결혼 후에도 정실보다 일타홍을 더 사랑하자, 일타홍은 남편에게 5일을 주기로 4일은 정실 집에서 자고 하루만 자기에게 오도록 규칙을 정했다.
그러나 심희수는 번번이 이 규칙을 어겼다. 일타홍은 공부에 방해가 될까 '과거에 급제한 뒤에 나를 찾으시라'는 편지를 써 놓고 집을 나오기도 하였다. 그 덕에 심희수는 열심히 공부하여 1570년(선조 3년) 22세에 진사시에, 이어 25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심희수는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 옥사에 재판관 정철(鄭澈)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리자 언관으로서 강력히 항의하다 삼척 부사로 강등되었고, 다시 35세 땐 허균의 형 허봉을 두둔하다 금산군수로 좌천되기도 했다. 심희수가 이조낭관(郎官)으로 있을 때 일타홍이 자기 부모가 있는 금산으로 내려가자고 간청했다는 설도 있다.
금산에서 지내는 중 일타홍은 병을 얻어 앓다, 내아(內衙)에서 심희수의 손을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은 "인생의 생사 장단은 한 가지다. 군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아 한이 없다. 낭군의 옆에 뼈가 묻혀 지하에서 다시 모시는 게 소원이다"였다. 심희수는 슬픔을 달래며 일타홍을 자신의 선산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에 묻어 주었다.
그 후 심희수는 임진왜란 때 도승지로서 의주로 파천하는 선조를 호종(扈從)했고, 한양으로 돌아와 대제학에 올랐다가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선조와 광해군 두 임금을 섬기며 곧은 충언을 올렸다. 그리고 1622년(광해군 14년)에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일타홍이 남긴 '달구경'(賞月)이란 시가 있다. "靜靜新月最分明 / 一片金光萬古淸 / 無限世界今夜望 / 百年憂樂幾人情(맑고 고요한 초승달 또렷하기도 한데 / 한 줄기 달빛은 천 년 만 년 푸르겠지 / 넓디넓은 세상에 오늘 밤 달을 보며 / 백 년의 기쁨과 슬픔 그 몇이나 느낄까)".
다음은 심희수가 일타홍의 시신을 실은 상여가 금강나루에 다다랐을 때, 마침 봄비가 내려 일타홍의 관을 덮은 명정이 젖는 모습을 보며 읊은 시 한 수다. "一朶芙蓉載柳車 / 香魂何處去躊躇 / 錦江春雨丹旌濕 / 應是佳人別淚餘(한 떨기 연꽃은 버들 상여에 실려 가는데 / 향기로운 영혼은 어딜 가려고 머뭇거리나 / 비단 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이 젖어드니 / 아마도 우리 고운 님 이별의 눈물인가 보다)".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아내는 여전히 중요하다. 성경에도 리브가를 아내로 맞은 이삭, 한나를 아내로 맞은 엘가나는 성공했고, 하와를 아내로 맞은 아담, 들릴라를 아내로 맞은 삼손은 실패했다.
/김형태 박사(한남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