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체스코는 일찍이 “죄가 있는 곳에 용서를“이라는 기도를 드렸다. 목회 초년병 시절 “목사님,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는 의미가 뭐에요?”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여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뜻을 찾아보니, “오히려 원수에게 숯불을 제공함으로써 따뜻한 온기와 양식을 조리할 수 있는 자비를 베푼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 숯불이 너무 소중하여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리고 운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으로 해석되며 용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철학에서 말하는 용서는 용서하는 자가 당연히 품을 수 있는 분노를 포기하고 가해자가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정의는 '숭고하고' '회복을 가져다 주고' '용기 있고' '건강한' 행위인 "진정한 용서"와는 구별된다. 피아제는 완벽한 상호성에 대해 언급하며, 모든 사람이 과거에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 받았거나 받을 수 있다는 가정 속에서 용서를 정의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피아제나 철학자들의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에서 명확한 사실로 나타나며,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은 자로서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피아제가 주장한 것처럼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등한 위치는 피아제의 주장에서처럼 가정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명확한 사실인 것이다.
성경의 용서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란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고 이 용서를 대인관계에서 실천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깊고 부당한 상처를 준 상대에 대해 갖는 부정적 판단, 감정, 행동을 극복하고 상대에 대해 긍정적 사고, 감정, 행동을 갖게 되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으로 대인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증진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적인 안녕과 넘치는 생명의 삶을 발견하고, 재창조 하는 일이다. 용서하다로 직접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는 “쌀라흐”인데, 그 뜻은 '들어 올림으로 가볍게 한다'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며 죄 용서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어깨에서 죄책의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림으로 그 사람의 삶을 가볍게 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의 용서는 '형벌에 대한 면제'라기 보다 '하나님과 용서받은 사람 사이의 화목'에 초점을 둔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으로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의에 어긋남이 없는 완전한 사랑이었다.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는 의미를 존 칼빈, 메튜헨리, 애머튼, 크랜필드, 박윤선, 핸드릭슨, 등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수에 대하여 친절과 필요를 채워줌으로 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내적 수치심을 일으켜 그 사람이 회개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숯불의 의미는 심판의 메시지와 회개의 의미, 그리고 원수에 대한 보응의 이미지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잠언 25 장 21-22 절을 인용하여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말하였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음식을 대표하면서 인간의 필요를 상징한다. 이렇게 원수의 필요를 공급할 때 “네가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으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원수의 필요를 채워주면 핀 숯을 머리에 놓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수를 보복하여 원수를 갚는 것보다 더 값진 승리이며 원수가 되었던 자가 친구로 돌아와 자기의 삶을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롬팔이팔을 좋아한다. 로마서 8 장 28 절로 그와 내가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일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