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이말은 이웃이 나의 삶을 가까이서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웃과 함께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쉽게 나눌수 있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사랑을 나누는데 있어서 서로가 지켜야 할 예의와 의무가 주어진다.
이것은 성경 십계명과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신5:16-21)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들과 사람들간의 관계의 형성인데 그것의 중심은 서로의 것을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며 서로를 해(害)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디까지 예의를 지켜야 하고 그 정도가 얼마 정도 되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양심과 안전이 수반 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정도에 대한 판단의 기준도 성경에 언급이 되어 있다. "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신23:24)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신22:8)
십계명에 나오는 말씀은 해서는 아니되는 (shall not) 것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그 규율을 깨뜨리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포도는 먹되 그릇에 담지는 말아야 하는 것은 양심의 문제이고 나의 집안에 안전한 장치를 해서 집을 방문한 사람이 다치지 아니하게 하는 것은 작으만 것에도 소홀히 하지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웃과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양심과 편안하게 해주는 베려의 마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을 볼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은 이웃을 초대한 사람이나 초대를 받은 사람간에 서로가 신뢰하고 축복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계절상 이른 여름에 조그만 하게 정원과 야채들을 잘 가꾸워 놓은 지인들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 정원에'상추, 쑥갓, 케일,호박...등'이 심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집에서 키울 수 없는 야채가 지인들의 집에서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것들의 싱그러움을 볼때 마다 감탄사가 절도 난다. "너무나 싱싱하다.", "된장에 상추를 싸서 먹으면 너무나 맛있을 것 같다.", "상추가 연하게 보인다." 그 소리를 들은 지인들은 보통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야채를 집에 가실때 조금 가져 가라고 말을 하고 칼과 봉지를 가져다 주면서 먹을 만큼 가져 가시라고 제안을 한다. 이 말은 방문자가 필요한 이상의 것을 가져가라는 것이 아니라 한 두끼 정도 먹을 만한 양만 가져 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방문자가 지켜야 할 예의이다.
그런데 양심의 도를 넘어 선다면 초대한 사람은 방문객이 다시는 자신의 집에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적당히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웃과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삶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사랑하는데 공식'이 필요하다.
성경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 하셨다. "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9)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웃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을 제시 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그렇다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동시에 사랑하라고 언급하였을까? 누구나 궁금하게 여길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하나님의 실체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하며 그것을 계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것의 첫번째는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부여한 십계명이고 두번째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신다. 주님은 죄인들의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밖여 죽으시어 율법의 완성을 이루신다. 그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주님의 새 계명이시다.
십계명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들과 관계의 형성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한 것이기에 과거의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나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소중하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신앙인이 지켜야 할 책무이다. 이러한 책무를 이행하고 예수님의 제자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가지의 원칙이 주어진다. 그것은 "듣고, 배우고, 따르라"는 원칙이다. 이것은 신명기 5:1-3절에 명시되어 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이것으로 볼때 예수님은 사랑의 실체이시며 하나님은 인류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동일하게 예수안에서 영혼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고 본다. 신앙인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혼을 사랑하며 자신이 속한 이웃 공동체를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은 주님이 주신 절대적인 명령이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의 사회는 인간의 영혼 구원과 이웃 공동체의 관계형성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기주이와 편안함을 추구하다 보니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고 이웃에 누가 사는 지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것으로 볼때 현대인은 생명의 가치의 소중함과 사랑의 아름다움의 맛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관대함이 사라지고 서로를 불신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며 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하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그들이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웃과 사랑이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를 지켜 나가기 위한 것이다.
크릭사이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 교회웹:thecreeksidechurch.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