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에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악의 위로는 무엇일까? 아마도 '괜찮아', '잘될 거야'라는 식의, 섣부른 긍정적 위로일 것이다. 우리는 때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부정적으로 인지하고, 애써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슬픔을 올바르게 겪고 나야, 비로소 마음의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슬플 땐 피하지 말고 한바탕 울어도 된다"고 토닥인다. 감독은 영화에서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겨지는 '슬픔'을 비중 있게 다뤘다. 슬픔의 순기능에 주목한 것이다.
영화는 '인간의 머릿속'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탁월하게 그려냈다. 매 순간의 기억은 각각 구슬 형태로 형상화되고, 오래된 기억은 '장기 기억 보관소'로 간다. 꿈을 연출하는 '꿈 제작소', 생각을 실어 나르는 '생각의 기차', 오래된 기억을 폐기 처분하는 '기억 쓰레기장' 등, '감정'과 '기억'이라는 추상적 세계가 블록버스터 뺨치는 모험의 세계로 그려진다. 폐기 처분된 추억이 서서히 망각되는 과정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핵심 기억 구슬은 '가족 섬', '엉뚱 섬', '우정 섬' 등으로 묘사된 인간의 인격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의인화된 다섯 감정 캐릭터 기쁨(joy), 슬픔(sadness), 소심(fear), 까칠(disgust), 버럭(anger)은 11살 소녀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밤낮으로 일한다. 라일리의 감정 조절을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캐릭터는 기쁨이다. 기쁜 기억이 많아야 라일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 소녀의 세계는, 그녀가 11살이 되면서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고향 미네소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가게 된 것. 소녀에게 대도시의 낯선 환경, 친구들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감당하기 버겁다. 감정들 역시 라일리와 함께 요동친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기쁨과 슬픔은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먼, 뇌의 어딘가로 떨어진다. 까칠, 소심, 버럭만이 남은 본부는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만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감정은 '기쁨'과 '슬픔'이다. 라일리의 감정 변화는 기쁨과 슬픔이 감정 컨트롤 본부를 이탈하면서 벌어지고, 라일리의 성장은 기쁨과 슬픔이 다시 본부로 돌아오면서 이뤄진다.
기쁨과 슬픔의 동행은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기쁨은 어떠한 힘든 상황에서도 '잘될 거야'라고 외치며 무한 긍정을 발휘한다. 슬픔은 연신 '난 이제 틀렸어'라고 중얼거리며 바닥에 무기력하게 엎드려 있다. 기쁨은 본부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슬픔을 떼어 놓으려 한다. 라일리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슬픔이 필요 없을 거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기쁨은 슬픔 또한 소중한 감정임을 깨닫게 된다. 기억 쓰레기장에서 소멸되어가는 라일리의 기억 구슬들을 살펴 보던 기쁨은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다. 기쁨이 행복했던 기억으로만 알고 있었던 한 추억이, 사실은 슬픔에서 비롯되었던 것. 하키 경기에서 진 라일리가 슬퍼하고 있을 때, 그녀의 가족들이 감싸 주고 위로해 주자 슬펐던 순간이 행복한 기억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라일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상상 속 친구 '빙봉'을 위로해 준 이 또한, 기쁨이 아닌 슬픔이었다. 슬픔이 빙봉의 우울한 감정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자, 빙봉은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슬픔은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는 감정"이다. 내 인생이 내가 슬픔을 느낄 수 있게 허락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기쁨과 슬픔은 본부로 돌아오게 되지만, 라일리의 상태는 이미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라일리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기쁨마저도 손을 쓸 수 없게 된 것. 다급한 상황에서 기쁨은 슬픔에게 외친다. "슬픔아! 네가 필요해."
라일리의 굳은 감정은, 최초에 부정적이라 여겨져 외면당했던 감정인 슬픔에 의해서 철회된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슬픔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자, 부모는 그녀를 따뜻하게 위로한다. 그리고 그 순간의 기억은 어떤 하나의 색이 아닌, 슬픔의 파란색과 행복의 노란색이 조화롭게 섞인 색깔의 구슬로 형성된다. 이후 그녀의 감정은 유년 시절처럼 단 하나의 명확한 색깔이 아니라 여러 감정들이 섞인, 더욱 성숙한 색의 구슬로 빛을 발하게 된다.
눈썰미가 좋은 관객이라면, 다른 감정 캐릭터들은 단색인 데 비해, 기쁨의 모습은 다색으로 표현된 것을 보며 의아했을지도 모른다('까칠'은 초록, '소심'은 보라, '슬픔'은 파랑, '버럭'은 빨강으로 표현됐다). 감독은 기쁨의 머리 색을 슬픔과 같은 파란색으로 설정한 것에 대해 "'슬픔'과의 연결 고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슬픔 뿐인 삶은 꺼려지지만, 기쁨만으로 가득 찬 인생이 행복할꺼라 단정할 수도 없다. 굳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얻고자 함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낸 뒤 찬란한 아침을 맞이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때론 지독하게 힘들고 슬픈 상황에서 하나님과 성도의 더 큰 위로와 사랑을 받으며 감격한 적도 있을 것이다. 감독의 말처럼, 기쁨과 슬픔은 연결돼 있다. 슬픔이 영롱한 행복으로 바뀌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믿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