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최근 처조카딸이 결혼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며칠 후 태어난 아이다. 엄마는 아이를 두고 자기 갈 길을 갔고, 그 이후로 연락도 끊고 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이가 성장해서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

 

아내가 엄마 몫을 해 주어야 하는 형편이다. 어느 날 아내가 '뭘 해 줘야 하지?' 고민했다. 나는 아내에게 대답했다. '엄마 없이 자란 아이니 불쌍하잖아. 당신이 알아서 넉넉하게 해줘!' 아내는 이런저런 살림 도구들을 해 주었고, 신혼집으로 가서 살림과 집안 정리를 해주었다.

결혼식 당일, 우리 부부는 부모 역할까지 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아내는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참 고마웠다.' 처가에 신경을 써 주는 남편의 마음이 고맙다는 말일 게다.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차지하기 원하고,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차지하기 원한다. 마음을 얻는 건 모든 걸 얻는 거니까. 그런데 부부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으면서도, '마음'은 멀 수 있다. 마음이 교류되지 않는 부부는 마치 한 지붕 아래 두 가정이 살고 있는 것 같다.

남편과 아내가 눈도 서로 마주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한 공간 안에 살아간다. 그러니 한 공간 안에 있어도 마음은 서로 먼 셈이다. 더구나 마음을 다른 여자나 남자에게 빼앗긴 채 살아가는 부부도 있다. 그러니 지옥이다. 빨리 마음을 배우자에게로 향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하나님도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성전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사람들이 헌금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계셨다(막 12:41-44). 여러 부자들이 자랑스럽게 많은 헌금했다. 그때 한 가난한 과부가 들어와서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다. 렙돈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가장 작은 청동 동전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이들의 헌금에 대해 평가하신다.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 분명히 부자는 '큰 돈'을 넣었다.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개'를 넣었을 뿐이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니? 왜 그렇게 평가하시는 건가?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얼마를 넣었다. 그러나 과부는 자신의 전부, 즉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 예수님은 '헌금의 양'을 보신 게 아니다.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의 양'을 보신 것이다. 참된 헌금은 '물질의 양'보다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

어떤 이는 말한다. "설사 억대를 호가하는 선물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없다면 그건 쓰레기 같은 선물이다. 설사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준다 하더라도 마음을 담으면, 그건 돈 주고는 절대 살 수 없는 선물이다." 헌금을 하고 예배를 드리기 전에,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 마음이 없는 선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적인 조건들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마음을 다른 데 두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경계하셨다. 그들의 마음이 엉뚱한 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막 12:38-40).

첫째,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들이 입었던, 길고 큰 술이 달린 가운인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둘째,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인사 받기를 좋아했다. 셋째,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의 윗자리에 앉기를 원했다. 넷째, 연약하고 힘없는 과부의 재산을 착취했다. 다섯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할 게 있다. '마지막 때에 그들이 받을 판결이 더욱 중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고, 착취나 일삼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데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마음이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기 위해 몇 가지 점검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변화를 받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도 없고, 분별할 수도 없다. 물론 한 번 변화받는 것으로 다 끝나는 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를 주도해 가야 한다. 그래야 마음을 하나님께 주목할 수 있다.

둘째, 마음의 거리감을 좁혀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예레미야도 동일한 지적을 한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를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렘 12:2)"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정작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다. '육체적 거리감'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심리적 거리감'이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 될 건 없다. 그런데 거리상으로는 가까이 있는데, 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위험하다. 영적인 세계도 그렇다. 주님과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야 한다.

셋째, 마음이 담긴 경건생활인지 체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적으로 하나님 가까이 있었지만, 심리적 거리가 멀었다. 그 증거는 그들의 경건생활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는 드렸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 제물을 갖고 예배를 드리러 왔지만 단지 '보이러' 왔을 뿐이다(사 1:12). 피가 가득한 손으로 예배하니 하나님이 귀찮아하셨다. 헌신도 마찬가지다.

마가복음 14장 3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화를 내어 여자를 책망하면서 말했다. '이 비싼 향유를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돈에 마음을 둔 사람과 예수님에게 마음을 둔 사람이 이렇게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을 둘러대지만 사실 돈 계산부터 하는 사람과 같은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대신 비싼 향유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리는 여인의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이 세상 소유'를 향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드려야 한다.

넷째, 마음이 통하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가끔 부부들이 하는 탄식의 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마음이 통해야 같이 살지.' 부부가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함께 동행하기 어렵다. 아니 함께 동행할지라도 지옥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과도 마음이 통해야 한다.

다섯째, 마음의 한센병을 치유해야 한다. '몸의 한센병'보다 더 심각한 건 '마음의 한센병'이다. 몸에 감각이 없는 것보다 마음에 감각이 없는 게 더 큰 문제다. 마음의 감각이 사라져가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한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보혈로, 복음의 말씀으로 치유를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