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말 했던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고, 우리의 옛 어른들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즉 사람은 한정된 수명을 다하면 영영 떠나지만 가신 분이 남긴 공로는 오래 간다는 것이다. 몇주전에 국경을 초월한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던 이승만 박사님이 세상을 떠났다.
몇달전 대화 중에 "따뜻한 봄날에 만나자"고 굳게 약속을 했는데 그렇게 떠났다니 꿈만 같고 또한 허망한 인생이라는 푸념속에 가슴이 아리다. 이 박사님은 원수를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람이다. 목사님이셨던 아버님이 평양에서 공산당에 끌려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6.25 때 다른 애국지사들과 같이 총살을 당하셨다. 몇일 후 그 많은 시신중에서 아버님을 찾아 매장하고 월남하셨다. 그 후 해병대에 들어가 원수 갚을 기회를 기다리던중 미국에 유학와서 공부하다가 새로운 변화를 맞게된다.
1960년 대 미국에서 민권운동이 한창일 때 그 일에 동참하면서 지도자이신 말틴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게되었다. 원수 갚는 방법을 새로 체득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이기는 법이다. 그 새로운 법을 받아드리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길이 옳다고 받아 드린후 화해의 사도로 변신해 이북을 30여차례 방문하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통일을 강조하며 기독교를 받아드리도록 권장했다. 그 결과 봉수교회나 가정교회가 생긴 것이다.
이 박사님은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이 있었다.
어떤문제든지 그 핵심을 빨리 찾아내고 판단력이 정확하고 또한 표현력이 탁월했다. 더욱 추진력이 강해서 정해진 목표를 잘 해내는 분이었다. 1992년에는 미국교회 협의회 회장이 되셨고 2000년에는 본인이 속한 미국 장로교회 212차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에 5명의 후보자가 있었는데, 본 교단의 장래가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자라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된다는 그의 정견발표는 대의원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고 단번에 선출되었다.
이 박사님 개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영광이고 한국교회가 크게 발전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이 박사님은 마음이 매우 따뜻한 분이었다. 언제나 환하게 웃는 다정함, 때가 묻지 않은 어린이 같은 밝은 얼굴, 늘 남을 배려하고 겸손한 성자 같은 분이었다. 누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발벗고 나섰다. 내가 미국 장로 교단의 중서부 지역 한인 교회 총무로 일 할 때의 일이다. 새로 부임한 노회총무가 한인 교회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에 더 참을수가 없어서 내가 내 자리를 걸고 단판을 지을까 고민하던 중에 이 박사님께 조언을 구했다. 알았다고 한후 몇일지나니 총무가 나를 찾아와 사과했기에 그 전쟁은 끝났다. 이 박사님은 영어도 잘하셨지만 인관관계가 원만하고 또한 화평의 사도였다.
'한 사람의 진가는 그의 관 뚜껑을 닫은 후'에 라고 하듯 이 박사님이 떠난후 그 분의 자리는 너무도 크게 비어있다. 좀더 사시며 조국이 평화통일 된 후 고향인 평양의 모란봉에서 능나도 섬을 내려다 보며 냉면을 못 드신 것이 너무도 아쉽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천군 천사들과 같이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실것을 믿으며 위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