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교회가 급성장한 일곱째 이유는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신앙과 생활을 양분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즉시 생활의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내면적 신앙과 외면적 생활을 일치시키는 신앙의 형태를 수용했다. 삶의 변화는 사회, 민족, 국가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써 민족 수난기에 한국 교회는 민족과 더불어 고난의 과정을 경과하였고, 개화와 항일의 대열에 앞장 설 수 있었다.
한국의 선교는 의료와 교육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개인생활의 변혁, 민족의 개화, 국가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구원의 축에서 신앙이 정착되었다. 따라서 입신 동기에 개화와 애국 관점에서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개신교가 처음부터 내세지향적 개인구원에만 치중했다면 개화와 민족운동을 지향했던 인사들의 입교는 처음부터 부진했을 것이다. 따라서 초기 선교사들은 여자학교와 맹학교를 세우고, 언더우드는 등유와 농기구를 수입했고, 헤론은 재봉틀을 수입하여 한국인들의 생활 개혁에 힘썼다.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세운 베어드(W.Baird)는 철저한 복음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교육 철학은 현실주의에 기초한 복음주의를 교수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내가 조선에 와서 전도하는 목적은 장래 천당에 가서 영적인 구원 얻는 것보다도 현재 육적인 구원으로써 전도의 요체를 삼는 것이다.”고 역설했다. 물론 이 말은 그가 교육자로 학생들에게 한 것이지만, 이 말 속에 복음주의와 현실주의가 양분되지 않고 병립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음 여덟째, 한국 교회 성장의 밑거름은 교인들의 기도운동이었다. 한국의 재래 종교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종교는 무교(巫敎)이다. 무교의 기본은 기도와 정성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한국인들이 기독교에 귀의한 후에도 기도 관행은 계속된다. 오히려 평소 습관 드려진 기도 습성은 이제 진정한 신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기도의 대상이던 피조물이나 잡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시고 인격적이며, 기도에 구체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엿다.
또 한국에 기독교가 유입되던 시기는 국가와 민족적으로 무척 어려운 때였다. 그러므로 개인과 가정 그리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따라서 예배나 개인적 기도 시간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 기간에 한국에서 세계 어느 교회에도 없는 독특한 새벽기도, 철야기도, 통성기도가 일어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 총무 브라운(A.Brown)도 한국 교인들의 기도 열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평양에서 열리는 한 기도회에 참석자가 1,000명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며, 1,400명이 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큰 규모일 것이다. 우리는 서울 연못골교회[연동교회]에 참석했다.……1,000명 정도의 신자들이 모였다. 우리가 어느 저녁에 선천교회에 갔을 때 1,200명이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한국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들으러 먼 거리를 갈 만한 가치가 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과 접견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찬양과 참회와 간구를 쏟아 놓는다.” 한국 교인들이 기도회에 모이는 열정적인 모습을 생생히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 교회를 두루 살핀 한 외국 부흥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한국 교인들의 기도 생황에 대해 적시했다. “한인들은 영혼을 위하여 매우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지난겨울 송도에서 부흥회가 몇 차례 열렸는데 교인들은 의례 밤 집회 후에는 산에 올라가서 얼어붙은 맨땅에 엎디어 성신 강림을 위하여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였다. 재령에서는 매일 새벽 5시 반이 되면 몇몇 사람의 한인들이 내가 유하고 있던 선교사집에 찾아와 그 선교사와 같이 한 시간 동안 기도하였다. 평양에서는 길목사와 장로 한 사람이 교회당에 와서 새벽 기도를 드리는 습관을 가졌다. 다른 교인들도 이 소식을 듣고 같이 참석 할 수 있도록 부탁 하였다. 길목사는 ‘누구든지 원하면 며칠 동안 새벽 4시 반에 모여 기도 할 수 있다.’고 알렸다. 그 이튿날에는 새벽 1시 반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2시에는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더니 4시 반에 가서는 400여명이 모였다.” 새벽기도회가 시작되던 때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두 말 할 것 없이 한국교회 성장의 밑바닥에는 교인들의 철저한 기도가 깔려 있었다.
아홉째, 한국 교회는 사회개혁과 애국애족의 교회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봉건적, 유교적 전통에 매여 있는 사회를 기초부터 개혁하는 일에 앞장섰다. 여성의 인권 신장, 차별적 신분제도의 철폐, 민권의 존중, 노동 가치의 고양, 미신타파 등의 사회개혁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따라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한국교회에 여성 교인들이 남성 교인보다 훨씬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 천 년 동안 억눌려 있던 여성들이 교회를 통해 한 인격체로 존중받게 되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남편이 첩을 얻어 아들을 보는 현실 앞에 절망하던 여인들이 기독교를 통해 이런 잘못된 문화의 척결을 보면서 기독교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양반, 중인(中人), 상인(常人:쌍놈), 천민이라는 계급 사회에서 차별받던 천민들, 백정, 노비, 남사당, 기생 등 그야말로 짐승 취급 받던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나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저들의 혹독한 억압 속에서 교회는 그 어느 집단보다 더욱 애국, 애족의 모습을 보임으로 자연히 기독교가 외래 종교지만 우리 민족이 믿기에 좋은 종교로 인식되었다. 일선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지사(志士)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재래 종교 보다 훨씬 애국, 애족 종교로 정착해 가는 모습을 보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