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구약시대에는 피가 섞인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핏속에 생명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궁극적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기에, 비록 하찮은 미물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귀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의 창조를 부모에게 맡기셨다. 부모는 하나님의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동역자들이다.
하나님의 생명 창조 과정은 쉬운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철저한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가장 값지고 거룩한 과정이다. 어머니들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날부터 해산하는 날까지 신체적·정신적으로 아마도 일생에서 가장 혹독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때로는 생명을 잉태하는 것으로 인하여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고, 급기야는 새로 태어나는 생명 대신 죽음의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모두가 축하해야 할 신비로움이요 한 가정의 복이지만, 부모들에게는 긴 고통의 기간이며 죽음까지 불사하는 위험 속에서 얻어낸 결과이다.
부모의 고통은 생명 탄생의 과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모들에게는 태어난 생명을 건실하게 키워야 하는, 생명의 위탁자로서의 임무가 계속 주어진다. 비록 힘든 대가를 지불하며 탄생시킨 생명이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지 말고 위임받은 청지기라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할 수 있도록 넉넉하고 큰 힘을 부여하셨다. 그것은 자녀에 대한 더없이 깊은 사랑이다. 자녀가 태어날 때, 이미 하나님은 그 자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부모의 마음 한가운데 원천적인 사랑을 심어 주신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순수한 사랑인 것이 그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성장한다 하여도,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아로서 성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반면에 좀 가난하여 생활에 풍족한 것 없이 지낸다 하더라도,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결코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자랄 수 있다. 부모의 사랑이 그 만큼 영향력이 크고 중요하다.
생명을 잉태하기 위하여 온갖 고통과 위험을 감내하였을 뿐 아니라 자녀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온갖 힘을 다 기울이며 사랑으로 보살펴 준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인륜의 대원칙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무너지면 다른 어느 것도 제대로 세움을 입을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요구하신다.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조금만이라도 넘겨다 볼 수 있다면, 자신을 위하여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을 낳아 길러주신 부모를 공경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어느 것도 감사할 수 없는 각박하고 메마른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부모들이 기억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순수한 사랑이 지나친 이기주의와 결탁될 수가 있다는 점이다.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자녀는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는 다만 그 생명의 양육을 하나님께 위탁받은 청지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인 양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원리에서 벗어나는 이기적 태도이다.
자녀에 대한 이기적인 자세는 자기 자식만 귀하게 여기고 다른 집 아이들은 무시하는 태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자기 자식이 귀한 줄 안다면 남의 자식도 귀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귀한 생명들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점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라고 표현했다. 이 명령은 자녀를 하나님의 생명이자 완전한 인격체로 대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다 하여도 그에게는 생명으로서의 고귀함이 있고, 한 인격체로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
자녀를 하나님의 생명인 인격체로 대하지 않을 때, 그것은 어린 자녀들의 마음 어느 구석에 서운함으로 남게 되고, 그것은 암세포처럼 그의 건전한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자녀들이 어리면 어릴수록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앙금처럼 그대로 남기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녀를 훈계할 때에는, 그들의 입장에서 잘 용납이 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배려가 필요하다. 그것이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자세이다. 잠언이 강조하는 것처럼 자녀 양육에서 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잠 20:30). 그러나 왜 매를 맞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야 매의 효과가 있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