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고수가 즐겨 사용하는 ‘연애 3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기다림의 원리입니다. 즉 상대방에게 적당히 기다리는 순간을 연출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상대를 생각하며 강력한 애착이 형성되게 하는 ‘유스트레스’ (긍정적 스트레스)가 생기기 때문이랍니다. 예약을 요구하거나 작은 공간만으로 운영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게 하는 음식점이 노리는 것도 역시 기다림의 ‘미학’을 통한 브랜드 가치 상승일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런 기다림과 희소성을 이용한 상술이 소비자에게 불편함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먹힌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자람의 원리입니다. 연애 고수들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모자란 점을 채워주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한다고 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상대방으로부터 채워줌의 원함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무심함의 원리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를 애태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기 때문에 연애 고수들은 이 방법을 결정적인 순간에 애용하곤 한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교우님들은 제가 연애학을 강의하는 것도 아닐터인데 이런 글을 적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 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신앙안에서 건전한 연애를 꿈꾸는 싱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즉, 성도들의 교회사랑입니다. 여러분과 교회가 이런 원리 가운데 “연애”한다고 가정해보시기 바랍니다. 소문난 잔칫집 ‘별볼일’ 없음에도 비싼 맛집을 찾는 고객들이 기다림의 불편함을 감내하듯 영의 양식을 찾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겪는 이런 저런 불편함이 ‘유스트레스’ (긍정적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면, 그 불편함은 유익한 것, 그리고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차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불편함을 즐거워하는 분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모자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이 모여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곳이지, 월마트나 백화점에서 내가 원하는 물건을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구매하듯 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면서 교회의 모자라는 부분에 대해 불평하는 언사를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 자신이 바로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모자람이 보이는 곳이 바로 여러분이 채우셔야 할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자람이 보이는 것도 축복의 기회이고 채우는 분은 복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무심함도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아무리 관심 결핍의 시대이고 모두가 한결같이 관심받기 원하지만 거기에 비해 베풀어지는 관심은 언제나 턱도 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저로부터 받으시는 관심이 무심하다 할만큼 터무니없이 부족하게 느껴지실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워낙 숫기가 없어서 그런 것일뿐,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오히려 사랑의 관계가 깊고 영글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사실 이런 표현이 심할 정도로 느끼하지만, 눈 한번 꾹 감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무심한 느낌을 받으신다면 그때도 역시 그렇게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복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연애고수에게 삼계가 있다면 성숙한 성도에게도 삼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사랑에 빠진 성도가 주님의 몸된 교회와 나누는 사랑을 키우기 위해 이 원리들을 적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교회와 사랑에 깊이 빠져보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