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율법은 삶의 가장 유익한 가르침이지만 인간을 의의 길로 나가게 할 수 없다. 아니 도리어 그렇게 하는 것을 막는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진술한다: "그러나 지금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3:21).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영과 문자』(De Spiritu et Littera)에서 이것을 "율법 없이, 즉, 그것의 도움 없이" 라고 해석한다. 바울은 로마서 5장 20절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장 9절에서, 덧붙여 말하기를, "그러나 계명이 이를 때, 죄가 살아난다." 이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8장 2절에서,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 부른다. 고린도 후서 3장 6절에서도 바울은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영과 문자』에서, 모든 율법, 심지어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율법에 적용시킴으로써 이해한다."(LW:31. 42-43)
지난 첫 기고에서 필자는 하이델베르크 논쟁의 28개 신학적 논제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설명했다. 이제 선한 행위의 문제를 다루는 첫 번째 부분 (논제 1-12)의 각 논제들을 하나씩 살펴 보고자 한다.
중세 후기 루터가 고뇌하며 씨름한 질문은 '의'에 관한 문제였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된 인간을 '하나님의 의'의 길로 향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중세 후기 가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의'(여기서 '정의' 또는 '공의')를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세속적인 방식로 이해했다.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하나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한 사람에게 반드시 은총을 주신다'(facienti quod in se est, infallibiliter Deus infundit gratiam) 는 견해가 교회 내에 팽배해 있었다. 중세 교회는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게 하는 인간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는 논제의 첫 시작부터 율법이 우리를 의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율법이 죄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않고, 도리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이다. 루터는 이러한 견해가 바울과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온 것임을 분명히 한다. 논제 1에 대한 루터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서 3장 21절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으며, 바울을 따라, 어거스틴도 그의 저서 『영과 문자』에서 이것을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도움 없이"나타난다고 해석한다.
얼핏 보면 논제 1은 율법 폐기론을 주장한 초대 교회 이단인 영지주의처럼 보일 수있다. 그러나 사실 논제 1은 율법의 분명한 역할에 대한 설명이다. 즉 삶의 가장 유익한 가르침인 율법은, 마치 법정에서 법에 따라 범죄자를 기소하듯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심문한다. 율법은 죄를 분명하게 드러냄으로 자신의 사역을 끝마친다. 따라서 율법은 구원할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인간을 의의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없다. 중요한 사실은 이 논제 1은 이방인들이나 불신자들을 향해서가, 하나님의 계시된 율법 아래 서 있는 자들, 곧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기독교인들 모두가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소한 어떤 것을 행해야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들도 알게 모르게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있다. 미국의 대형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의 아내인 빅토리아 오스틴(Victoria Osteen) 목사는 최근에 올린 설교 동영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 스스로를 위해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을 행하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행복하길 원하신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아올 때, 예배를 드릴 때, 사실은 하나님을 위해서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를 위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교회와 신학에는 우리가 최소한 어떤 것을 행해야만 하고,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예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심각한 죄성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심리학적 용어를 빌어, '내적 상처' 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교회 설교 강단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으니, 이제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행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로 가득하다: "여러분들은 이미 은혜를 받은 자이고,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니, 이제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선한 행위와 업적이 필요하다."
그러나 루터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 라고 말한다. 율법을 행하는 것은 결코 의에 이르게 할 수 없고,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낱낱이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선한 행위와 업적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닌, 단지 죄인으로서 철저하게 엎드려 은혜를 구하는 자의 모습으로 서게 만든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은혜를 주시는 분으로 관계하고자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 은혜를 전적으로 받는 자가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은혜를 향해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이 먼저 분명하게 강조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논제 1은 믿는 자들 안에 인간의 선한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시키려는 자들을 향한 분명한 메시지 이다. 영광의 신학은 율법이 우리를 구원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자는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이것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십자가의 길'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 정진오 목사는...
루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Research Fellow와 예일 신학대학원 Visiting Scholar를 거쳐 현재 미국 시온루터교회 (LCMS) 한인부 담임목사로 재직중이다. 연락은 전화 618-920-9311 또는 jjeong@zionbelleville.org 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