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집사님 한 분이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서 기르는 야채를 취해 식사를 하기 위해서. "아악~!" 옥상을 오르는 순간 까무라치게 놀랄 장면을 목도했다. 옥상 빨랫줄에 한 남자가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생활을 비관하여 자살을 한 게다. 평소에 서로 오가며 친분이 있었던 분이기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집사님은 너무 충격을 받아 집에서 잘 수도 없었다. 그래서 딸 집에서 자야만 했다.
그에게는 이제 다 성장한 아들과 딸도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최근 그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당연히 경제적 압박이 심했다. 더구나 아내는 위암 말기 환자이다. 오늘 내일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 결국 압박하는 현실 때문에 세상을 떠날 것을 선택한 것이다. 남편이 자살하고, 며칠 후에 아내도 눈을 감았다. 아마 남편의 죽음이 충격이 된 듯하다.
인생길을 걷다 보면 원하지 않는 일들이 다가온다.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짜증스럽고 원망스럽다. 살고 싶은 마음도 살아갈 용기도 사라진다. 더구나 상황을 그렇게 만들고,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든 사람에게 분노가 치민다. 그래서 똑같이 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 그렇게까지 분노할 필요는 없다. 힘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상황이 좋기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인생 퍼즐이란 게 그렇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어디 퍼즐 조각이 아름답고 화려한 것만 있는지. 멋지고 매력적인 퍼즐만 다가오는지. 누구에게나 이런저런 퍼즐조각이 다 다가온다. 그렇기에 그러려니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퍼즐이 달라 보인다.
중국 사람들에게 '1~2할'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인생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8~9할이라는 게다. 인생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80~90% 되지만, 적어도 10~20%는 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이들을 보고 살자는 것이다. 그렇다.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관건이다. 사람들은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을 탓한다. 그러나 절망적인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바로 절망이 독약이다.
좋아 보이지 않은 퍼즐을 통해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이 결코 틀리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핍박했다. 돌을 들어 그를 쳤다. 돌에 맞은 스데반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결국 그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처참하게 죽었다. 속상한 일이다. 슬픈 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다. 스데반의 핍박으로 흩어졌던 사람들을 통해 선교가 확장되어 간 것을.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스데반의 순교는 세계 각지로 복음이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함부로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로마에서 쫓겨났다. 기독교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그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계기가 되어 바울을 만났고, 바울로부터 깊이 있는 복음을 듣게 되었으며, 그를 도와 협력하는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다(행 18:2-4). 로마에서 쫓겨난 게 새로운 출발점이 된 게다.
예수님도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 불의한 재판관들은 예수님을 죄인 취급해서 사형을 언도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비웃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힘들고 비참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을 치러야만 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과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라면, 구태여 이런 길을 걸어야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하시고, 입으로 '주'라고 시인케 하셨다.
나는 보잘것없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내가 어머님 뱃속에 있을 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가난한 살림에 불성실한 남편을 만난 어머니는 광주리를 이고 과일 장사를 하셨다. 복숭아, 감 같은 과일을 따다가 이 동네 저 동네 수십 리 길을 걸어서 장사를 하셨다.
어느 날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실한 과일을 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발을 옮기는 순간, "뚜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썩은 감나무 가지를 밟아서 부러진 것이다.
그때가 만삭이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이가 놀지를 않았다. 그것도 3-4일씩이나. 모두들 생각했다. '아이는 죽었다.' 3-4일이 지난 후에 엄마 뱃속에 있는 아이가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아주 작은 체중으로 태어났다. 자라는 것도 보잘것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지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더구나 어느 날 우리 동네에 시주를 온 스님이 우리 부모님에게 던진 한 마디. "이 아이를 절에 입적하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 오래 살 수 없다기에 호적에도 올리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야 호적에 올렸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는 초등학교도 9살에 들어갔다. 말하는 게 어눌해서였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서 목사가 되었다.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행복한 전도 세미나, 중보기도 세미나, 제직 세미나, 가정 세미나 등에 강사로 불려 다니고 있다. 말을 제대로 못해서 초등학교를 늦게 입학한 아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데는 문제될 게 없었다. 잘났다는 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별볼일 없는 자도 그렇게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게다.
인생 퍼즐을 함부로 단정짓지 말아야 한다. 인생 퍼즐은 우리가 보는 한두 편의 파편으로 다 말할 수 없다.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게 숨겨져 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퍼즐을 어떻게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나쁜 일들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실패를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게 바로 믿음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