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람들은 행복을 찾는 행복순례자들이다. 행복은 어떤 사람만이 누리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아무나 행복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어디에 머무르거나 어떤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속에 그리고 자기가 그리는 모양에 따라서 행복은 그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스펜서 존스(Spencer Johns)가 지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에서 행복하게 사는 지혜를 얻게 된다. 두 마리의 생쥐, 스니프와 스커리, 두 명의 꼬마, 헴과 허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이 좋아하던 치즈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 치즈는 그들에게는 행복이었다. 노력과 결실의 결과여서 정말 좋은 날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 치즈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스니프와 스커리는 없어진 치즈 때문에 놀라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잃어버린 치즈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치즈를 찾으려고 떠났다. 그들은 잃어버린 치즈보다 더 좋은 치즈가 있는 창고를 발견했다. 반면 헴과 허는 주저했다. 치즈가 없어진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누가 내 치즈를 가져갔느냐고 소리만 쳤다. 그러던 중 허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치즈를 찾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헴은 그러지 못했다. 허는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새 치즈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는 교훈을 배우며 이전보다 더 좋은 치즈를 발견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행복을 찾는 세 가지 원리를 배우게 된다.
첫째는 누구를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흔히 변하는 상황에 대해서 원망을 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처럼 잘 있었던 것이 왜 문제가 생겼냐고 남을 탓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그 일어난 일에 대해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를 한다. 성경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요셉의 10명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해서 아랍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넘겼다. 요셉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게 되었다. 요셉이 우여곡절 끝에 국무총리가 되었다. 훗날 세월이 흘러 형들과 요셉이 만났을 때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들이 한 일 때문에 다 잘 되었다고 했다. 원망은 미움을 낳고, 미움은 상처를 낳고, 상처는 아픔을 낳고, 아픔은 불행을 낳게 된다.
둘째는 변화에 적응하라는 것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한국 월드컵 축구는 변화되어야 한다. 눈을 열어 세계의 축구를 배워야 한다. 한 때 잘 나가던 기업들이 뒤처지거나 문을 닫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유비무환”을 주장했다. 십만 대군 양병설을 주장했다. 운전을 잘하려면 앞만 보는 것만 아니라 멀리를 바라보아야 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본다고 했다. 지금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 적응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1997년에 IMF를 맞았다. 그 위기 속에서 지혜롭게 잘 대처했다. 온 국민들이 마음을 다했고, 근검절약과 연구개발을 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셋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치즈를 찾아 떠난 꼬마 허는 두려웠다. 찾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배고픔의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신뢰를 가지고 떠났을 때 좋은 치즈를 찾았다. 성경은 말씀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4;6). 이 세상에 제일 용감한 사람은 힘이 센 사람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각오를 한 사람이다. 많이 가지려고 하면 두려움이 더 생긴다. 그러나 많은 것을 내려놓으려고 하면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든 잃어버릴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행복을 찾아 떠난다. 잃어버린 내 행복, 그 어느 누가 가져간 행복을 찾아야 한다. 누가 내 행복을 옮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