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인 비잔틴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오늘날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이 바로 그곳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철옹성으로 둘러쳐진 곳이며 그 누구에게도 점령당한 적이 없는 점령 불가능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제왕 술탄은 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을 이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앞바다는 좁은 만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진입로에 거대한 쇠사슬이 둘러쳐 있어 해군 전함이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 때 오스만의 제왕 술탄은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쇠사슬을 쳐놓은 곳을 넘어 바다에 다시 배를 올려놓고 선상포격을 감행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합니다. 이후로 전쟁사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세상에 점령할 수 없는, 점령 불가능한 요새는 없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짧은 시간에 엄청난 사상자를 낸 전투가 참 많았습니다. 남북전쟁의 전사자는 남북군을 합쳐서 약 70만 명에 이릅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희생자는 29만명이었습니다. 이를 인구비율로 다시 환산하면 남북전쟁의 전사자는 2차세계대전의 전사자보다 10배나 많은 260만 명 수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남북전쟁에서 이렇게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을까요? 남북전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영화 <게티스버그>를 보면 전진하던 북군 병사들이 평범한 목장 울타리에서 남군과 맞닥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울타리 앞에서 대포와 총알이 날아오는데도 병사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좌우로 정렬하여 열과 오를 맞추는 학생들처럼 줄을 서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것은 남북전쟁 이전에 칼과 화살로 전투를 벌일 때의 병법입니다. 무기는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개발되었지만 전투법은 여전히 낡고 고루한 것을 고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사를 통해서 통찰의 중요성을 발견합니다. ‘전쟁의 승패는 화력이나 전력보다도 통찰이 좌우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의 승패 뿐만 아니라 인명손실의 최소화도 통찰이 관건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힘과 막강한 무기 체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통찰이 없다면 사실 무력은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과 23전 23승의 전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함대와 병사들을 이끌고 원균은 일본 수군에 완패를 당하며 조선을 위기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통찰의 차이였습니다. 전투의 모든 면을 꿰뚫어 보았던 이순신 장군의 통찰이 자칭 지장이라던 원균에게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통찰은 사건과 사물을 관통하여 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시대를 이끌었던 거목들의 공통점은 통찰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인물의 전제는 통찰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통찰에서 발견됩니다. 완전히 망한 인생 속에 숨겨져 있는 무한의 잠재력을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돈, 권력, 명예의 헛점을 꿰뚫어 보시며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임을 분명하게 보시는 혜안의 소유자였습니다. 읽고 또 읽어 아예 외우다시피한 율법. 그렇게 율법을 다루었던 수많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율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명확하게 표현하심은 번뜩이는 통찰이 그분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찰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이 있다면 그것은 통찰일 것입니다.
통찰은 지식이나 전문성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때로 통찰있는 비전문가가 통찰없는 전문가보다 훨씬 나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통찰없는 전문성은 무용지물입니다. 통찰없는 리더십도 무용지물입니다. 통찰없는 용기는 위험합니다.
시대와 사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을 구합시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듯 자신의 삶,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 하늘의 통찰을 구합시다. “오, 주님.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와 통찰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