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용 목사.
 이강용 목사.

우리는 세상 살면서 리더가 되기를 갈망하고 노력한다. 목사 되는 것도 처음에는 주님의 종 된, 헌신된 자세로 시작하지만 개척하고 교회가 커지면서 평신도들로부터 받듦을 받고부터 목은 점점 곧아져 간다. 성도들의 발을 씻겨 주기보다는 오히려 목사이니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저 깊은 곳에서 점점 자라난다. 그러니 평신도를 이해해주고 감싸주고 먼저 다가가 품어주는 일은 생각지도 못한다. 언제나 평신도가 먼저 목사를 이해해 주어야 하고, 품어야 하고, 절대 순종하여야 한다고 여긴다. 이건 예수님과 너무 거리가 먼 사고이다.

 

목사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에 평신도가 함부로 목사를 비방하거나 불순종하면 죄라고 여겨, 그렇게 할 생각을 않는다. 평신도가 혹 반기를 들거나 목사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목사는 매우 기분 나빠하며 뒤에서 그 평신도를 나쁘게 평한다. 그러나 진정한 목사라면 먼저 평신도에 다가가 불편한 심기가 무엇인지 묻고, 자신의 잘못부터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상한 백성, 병든 백성을 살리기 위해 목사가 된 것이지, 목에 힘 주고 존경받고 부리기 위해 목사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하라고 부름받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몸소 세상에 나타내어 보이기 위해 자원하지 않았던가?

초심으로 돌아가야 교회가 산다. 그래야 목사도 살고 평신도도 함께 산다.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십자가 사랑이지 않은가? 먼저 목사가 변하여야 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은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회개기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도 목사들의 회개기도에서 가능할 것이다. 물은 위에서부터 흐른다. 목사가 변하면 평신도는 따라 변한다. 부흥은 의외로 쉽다. 그러나 이것이 안 된다. 종교개혁도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로 일어났고, 그들을 쇄신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우리 개신교가 태생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개신교 지도자인 목사들부터 변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제2의 종교개혁과 제2의 평양대부흥은 가능하다.

또 한 가지, 목사가 바꿔야 할 부분이 있다. 평신도는 가르침을 받기만 하고, 가르치는 것은 목사의 전유물인 양 여기면서 평신도가 평신도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좋아하지 않는 면이다. 그런 행동은 교회 내에서 스스로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요즘은 목사 안수를 받고도 평신도로 섬기는 성도들이 많다. 때로는 영적 뿐 아니라 지적, 인격적으로 목사보다 훌륭한 평신도들도 많다. 훌륭한 평신도 사역자들을 목사는 스스로 찾아 세워야 한다. 가르치는 것이 목사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는 목사는 속히 그 잘못된 생각을 고쳐야 교회가 산다.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교회를 세우는 동역자로서 서로 존중하며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기회를 공유하는 것이 교회에 이롭다.

목사도, 평신도도 모두 성도이며 주님이 인정하는 만인제사장이다. 너무 사람이 만들어 놓은 체제에 빠져 교회 부흥을 막아서는 안 된다. 왜 목사와 평신도로 구분하여 평신도는 배우는 자, 목사는 가르치는 자로 이분화해야 하는가? 가르치는 것도 다른 은사와 같이 하나의 은사이며, 모든 은사는 동일하게 귀한 것이다. 높고 낮은 것이 없다. 그러면 목에 힘 줄 은사도 없다. 목사도, 평신도도 서로 가르치며 배워 가며 동역하여 교회를 세워간다면, 얼마나 생동감 있고 살아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목사의 가르침으로 평신도가 가르칠 정도가 된다는 것은 목사로서 자랑이 되어 다른 교회에까지 선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 성도가 있다는 것이 은연 중에 두려워 그를 거부한다면, 그 교회는 자신을 위한 교회이지 하나님을 세우는 교회는 되지 못한다. 그런 교회는 자신의 기업이고, 평신도는 사장과 기업을 위해 일하는 직원에 불과해진다. 기업도 직원을 신뢰하고 북돋아서 사장의 역할을 나누어주기도 한다. 하물며 교회가 기업보다 못하다면, 그 교회에서 주님이 살아 역사하실 수 있을까?

교회는 주님께서 주인이시며, 목사와 평신도 할 것 없이 모든 믿는 성도가 동등한 자격과 위치에서 함께 세우는 형제, 자매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목사와 평신도로 구분된 계급 사회가 아니다. 목사가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에 설 수 있고, 평신도가 목사의 위치와 역할도 할 수 있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목사와 평신도의 구분은 교회 운영을 위해 편의상 설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것이 교회를 위해 더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목사가 교회를 자신의 사업으로 여기는 단적인 예를 두 가지 들어보겠다. 하나는 성도의 교제이다. 목사는 성도의 교제를 기회 있을 때마다 외치고 권하지만, 그것은 오직 자신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 간이지, 다른 교회 성도들과의 교제는 아니다. 원하지도 않는다. 아니 안 하기를 원한다. 타 교회를 방문하거나 타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듣고, 타 교회 프로그램을 소개하거나 선전하면 이상한 교인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목사를 포함해서 우리 모든 성도들도 그렇게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옳게 여기고 있다. 잘못 주입되어 옳지 않은 생각을 옳은 생각처럼 느끼고 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한 주인이신 주님을 모시는 곳이고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한 식구인 형제 자매이므로 서로 왕래하며 교제하며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데, 목사들은 자신의 교회 내로 교제를 국한한다. 목사는 이 교회 저 교회 목사들과 정기 모임을 갖고 교제해도 되고 성도는 안 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집 식구이니 빼앗기지 말아야지 하는 우려 때문일까? 이는 매우 이기적인 사고이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서 넘어온 성도가 혹 말썽이라도 부리면 어느 교회에서 넘어온 사람이라며 폄하하기도 한다. 이는 전혀 주님의 가르침과 다르다. 목사의 가르침이 온전히 성경적이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반(反)성경적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미 잘못 가르쳐 왜곡돼 버린 진리가 너무 많다. 그런데 이를 바로잡을 용기 있는 목사도, 지도자도 없다는 것이 더욱 암울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를 주장했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 가르침에서 참 제자가 나오고 바른 교회가 세워져 천국을 확장할 수 있을 텐데, 과연 그 때는 언제일까? 나를 포함해 모든 목사들이 회개할 때다.

또 다른 하나는 선교이다. 선교를 부정하는 목사는 없다. 그러나 얼마나 열심인가가 문제이다. 주님이 부활 후 승천 직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에 대한 순종이 무엇보다 중요한데도, 교회는 이 부분을 어떤 의미에서 기피하는 경향도 있다. 선교는 교회 밖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내실을 다지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계산 때문이다. 주보엔 선교하는 교회이고 선교사를 지원한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그러나 성도들한테 선교를 권하거나 선교 사역을 위해 교회 차원에서 지원하는 부분은 인색하다. 오히려 그 열정과 비용을 교회 내실을 다지는 데에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 행사들은 있으나, 정작 해야 할 선교을 위한 교육이나 훈련은 없다. 아니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김을 빼 버린다. 선교에 열을 올리는 성도는 좋은 평을 듣지 못한다. 그래서 선교단체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교단체는 교회와 연합하고 지원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원활하지 못하니 매우 허약한 상태로 사역한다. 교회마다 남선교회·여선교회가 있지만, 그것은 친목단체이지 선교와는 거리가 멀다. 이름 뿐인 선교회이다. 선교한다고 행사차 해외 선교지로 나가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마저 진정한 선교라기보다 성지순례에 불과하다.

선교 없는 교회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이름 뿐인 교회이다.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 주님의 말을 듣지 않는데 주님이 그곳에 거할 수 있을까? 성도들은 그렇게 믿는 것이 참 믿음인 줄 알고 믿는다. 거짓 믿음을 참 믿음으로 인식하고 믿는다. 다 누구의 잘못인가? 어리석은 하나님의 백성을 참으로 인도할 의무가 목사에게 있다. 목사들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강용 목사(중국 대련이공대 교수,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