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1840~1917)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유명한 청동 조각상이 있습니다. 본래 로댕이 13세기 이탈리아 시인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편을 형상화해서 "지옥의 문"이라는 조각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지옥의 문"은 186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퍼즐처럼 만들어진 높이 6M의 거대한 조각 작품으로, 그 안에 자체적으로도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세 망령>, <탕자>, <절망>, <Kiss>등의 걸작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이 고뇌에 가득 찬 모습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군상(人間群像)들을 바라보면서 사랑과 질병, 절망, 죽음 등 가장 극적인 인간들의 감정과 지옥의 상황들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간을 보내면서, "지옥의 문"에서 <생각하는 사람>처럼, 나 자신이 손으로 턱을 고이고 머리숙여 겸손하게 몇가지 깊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선 "정말 그런 곳이 있단 말인가?", 지옥의 실존을 생각해보고, "과연 어떤 곳인가?" 실상을 생각해보고, "인생의 죽음과 종말과 심판",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 형벌, 죽음에서 벗어나 "살 길(구원)" 찾을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뇌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지옥이나 가라!"고 하면 얼굴을 붉히며 싫어하는 이유는 지옥의 실재(實在)를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옥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지옥이 있으니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지옥의 실상을 친히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지옥은 밀러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 교제가 완전히 두절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곳이요, 지난날의 행위와 새까맣게 타버린 영적 죄악들이 낱낱이 처절하게 기억나는 공간입니다. 지옥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토마스 플러나 조지 허버트의 말처럼 배은망덕한 변명과 핑계와 소원만 가득 찬 곳입니다. 마귀와 저주받은 자가 함께 거하는 영원한 불 속(마25:41)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끔찍한 형벌(마15:29-30)로 몸과 영혼이 영원토록 죽지도 않고, 끝없는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계19:20). 목 마르고, 무섭고, 어둡고, 답답하고, 괴롭고, 너무 뜨겁고, 인간의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1880년 "카라마조프 형제"라는 작품에서 도스트예프스키는 "만일 지옥에서 물질이 타는 불이 있다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뜨거운 불 때문에 당하는 육체적 고통으로 지옥에서 정말 더 느껴야 할 마음의 고뇌를 잊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구더기도, 벌레도 타지 않는 곳(막9:48, 이사야 66:24), 영혼이 불멸하는 곳이고, 영원히 육체적 고통의 벌을 받는 곳이 지옥이기 때문이죠.
지옥이 너무나 끔찍하고 영원한 고통이 있는 곳이기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지옥문(地獄門) 입구를 막고 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미련하게 보이지만 십자가를 자랑하며 그 능력을 힘입어, 적극적으로, 목숨 걸고라도 누구든 못 들어가게 막아야 할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장래의 소망과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영원한 구원과 살 길을 얻은 나 처럼, 모두가 지옥문(地獄門)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장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