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설교는 넓은 의미에선 많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작가적 아우라 향취)가 있어야 한다. 즉 문체가 곧 인물이란 말이 있듯이, 설교자는 자기스러움의 설교가 필요하다. 내용적 문체적, 억양, 제스쳐 등 모두.... 누군가의 일방적인 카피캣이 되지 말고....
둘째로, 내용과 문체적 '고상한 무관심'의 중요성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선, (설교적 문체론에서 생각할 수 있는) 청교도적인 '노블 네글리젼스'(고상한 무관심)의 다른 표현이 아닐런지.... 청교도 설교자들이 세상적인 높은 학식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했지만, 현학적 표현과 내용을 될 수 있는대로 '무관심스럽게 포기하고,' 진리의 핵심을 어린이부터 노인에게 걸친 모든 청중에게 들리게 설교하려고 노력했던, 또 다른 의미에서의 설교자적이고 작가적 고상한 무관심이 아닐런지....
셋째로 생각할 점은, 원론적인 것이지만, 내용과 문체적인 일관성이다. 이것은 탁월한 작가의 글쓰기와 작품에서 보여주는 궁극적이고 일관된 원리이다. 예를 들면, 헤밍웨이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철저히 단문으로 된 소위 '하드 보일드 스타일'로써, 직설적으로 현대인의 불굴의 휴머니즘의 미학을 보여주었다(특히 [노인과 바다]에서). 한편으론, 미국의 윌리엄 포크너와 영국의 제임스 조이스는, '악명높은' 만연체와 난해한 글쓰기로 작가적 아우라와 내용과 문체적 통일을 보였다. 특히 조이스는 당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지방을 넘어가는 기법인 소위 '무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인간의 의식속에 흐르는 꿈과 무의식을 표현할 방법으로, 만연체적 글쓰기를 보여준다. 주제를 잘 담을 그릇이 어떤 형식에 어울릴까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어떠한가? 물론 단순 명료한 설교와 글쓰기가 좋다. 왜냐면 현대인들이 인터넷과 모바일 폰에 익숙해서, 만연체적인 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존 스타트의 글이 사랑받은 문체적인 이유일 수 있다. 그렇다고 만연체적인 글쓰기가 불가능할까? 꼭 그렇지만은 아닌듯하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리더요 신학자라도 할 수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들과 특히 대표작 [신앙감정론]을 읽어보면, 결코 스타트적이거나 헤밍웨이적인 글형식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의미에선 (내가 해석해서) 그는 복음의 진리는 너무도 심오하기에, 아마도 때론 인간적인 편리(단문적 글쓰기)을 넘어서, 만연체적인 설교/글쓰기를 통해서, 복음과 진리의 깊은 은혜를 전달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설교엔 정밀한 논리와 탁월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연체적 그의 글과 설교는 당시와 현대인에게도 깊은 도전과 영향력을 주고있다.
마지막으로, 바로 '진리를 말하되 비틀어서 말하라'(Tell all the Truth but tell it slant)는 지혜이다. 미국 여류 시인인 에밀리 디킨슨은, 일종의 비유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말하면서, 진리를 이야기 할 때, 비유적으로 비틀어서 이야기 하라고 했다. 물론 진리를 왜곡하라는 것은 아니고... 이것은 최근에 소위 '비유 신학'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예수님과 바울의 비유에서 처럼. 얼마 전에, 유진 피터슨의 동일한 제목의 책에서도 비유의 전복적인 역설적 원리를 말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피터슨은 시인과 작가는 목사와 유사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진리의 비틀어 말하기'는, 아마도, 문학 이론에서 잘 알려진 러시아 형식주의의 핵심인 소위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와 매우 비슷하다. 작가나 시인은, 동일한 내용을 낯설게 표현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신학적 낯설게 하기의 대가는, 20세기엔, 씨 에스 루이스가 아닌가 생각한다.
(*씨 에스 루이스의 이 언어연금술사적인 측면은, 몇 년 전의 공개특강의 일부에서 설명함, http://www.trinitydc.net/technote7/board.php?board=qqqlewis&command=body&no=6&)
좋은 글쓰기의 지혜를 생각하면서, 언젠가 선배 목사님이 제게 좋은 설교에 대한 지혜를 나누신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 '심 목사, 좋은 설교는 잘 숙성한 된장같은 맛을 주어야 해....' 이 때 문득 생각난 것, 아, '대장금'의 장금이가 좋은 요리를 위해서, 장독에 오래 숙성한 된장을 왜 그토록 애지중지했던지... 그 장면을 교차 생각면서 이해했다^^.